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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미

미술비평


복잡계 안 원리를 향한 충동 (The Urge to Principle in Complex System)
- 김주현의 <복잡성의 법칙에 관한 연구>에 대한 미학적이며 의사(擬似)물리학적 연구
2004


서론
1. 문제제기: 세계는 복잡하다. 어떻게 복잡한가?
2-1. 법칙의 고안 및 설정 :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내기”
2-2. 단순하게 복잡한(simply complex), 그 형용모순이 내재한 에너지와 창발
3-1. 조각적 증명: 제기된 문제 ‘세계는 복잡하다’는 조각적 해(解)를 갖는다.
3-2. 반복과 차이 : 하나의 조각(a piece)이 무한한 조각(the sculpture)이 될 수 있는 방법
결론


- 서론

“세계는 어떠한 원인 또는 우연에서 생긴 결과다. 예컨대, 후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세계, 즉 규칙성을 가진 아름다운 구축물인 것이다.” - Marcus Aurelius

“[창발(emergence) 이론은]인간이 극히 예외적인 우연한 존재라기보다는, 우주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기대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Stuart Kauffman


이 논문1)은 김주현의 <복잡성의 법칙에 관한 연구>(이하 <복잡성연구>)라는 미술을 다룬다. 여기서 ‘미술’은 하나의 조각품이나 그림과 같은 예술의 결과물만을 의미하지 않고, 자연과학(물리학?생물학을 포함한 복잡계 이론)과 인접하여 문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조각적으로 증명하는 일종의 ‘과학 형식의 미술’을 지칭한다. 먼저 보르헤스처럼 물어보자. 그 해답이 ‘미술’인 어떤 수수께끼가 있어 질문자가 그것을 물을 때,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미술’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답으로 질문을 만들어서는 수수께끼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수수께끼’를 ‘창작’으로, ‘질문자’를 ‘작가(artist)’로 바꿔 생각해보자. 무엇인가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해 낸다는 의미에서 창작을 업으로 하는 작가가 자신의 작품 전면에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은 기성의, 이미 문법화 되어 안정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미술(Art)”일 것이다. 물론 기원전 15000년 이전 <벽화>로부터 시작하는 공식서양미술사는 끊임없이 ‘정의된 미술’을 인용해서 재정의해야 하고, 그 장구한 역사를 물려받은 현대미술은 그 기성 문법의 “미술”을 인용 ? 차용 ? 패러디 ? 알레고리화 함으로써 ‘창작’을 역전시키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세계가 복잡한 만큼, 또 수많은 작가들이 있는 만큼, 미술을 답으로 한 다종(多種) 다성(多性)의 창작이 있을 것이다.
조각가 김주현의 <연구>는 미술이다. 너무 당연한 듯한 이 규정은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미술을 “모방”이라든가 “감정의 표현”, “의미 있는 형식” 혹은 “예술계 전시물2)같은 것으로 이해할 경우, 그 범주화에 들지 않기 때문에 당연하지 않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김주현은 “작품을 만들면서 결과물이 나타내는 형태나 이미지, 스토리를 구상”하는데 관심이 없으며, “무의미를 대변하는 정육면체”같은 형태를 취함으로써 “어떤 특정한 미술사조와의 연관성”을 피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논리”를 적용하여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3) 말하자면 시각이미지로 무엇인가 모방하려 하지 않으며, ‘감정’의 스토리를 짜려 하지 않고, ‘의미 있는 형식’같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김주현은 미술사조뿐만 아니라 미학이론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아직 ‘답’이 나오지 않은 어떤 미술을 하고자 한다.
김주현의 미술은 자연과학과 더 친근 관계에 있는데, 그 중에서도 고전역학의 결정론과 통계역학의 확률론에 입각한 근대과학에 정면으로 도전한4), 1970년대 이후 급부상하고 있는 《복잡계(Complex System) 과학>5)과 특히 깊게 관련되어 있다. 작가가 1990년대 이래 지속해 오고 있는 조각 작업―<쌓기>, <경첩>, <다체문제(Multi-Body-Problem)>, <Simply Complex>―은, 한편으로 작가가 발상한 고유한 개념에서 출발한 작업이었는데 이후 우연찮게 복잡계 이론에서 유사한 개념과 연구 방법을 발견한 경우와 이후 그 이론을 접하면서 좀 더 개념적으로 명징해지고 확장된 작업들로 나뉜다. 경위는 다르지만, 우리는 두 경우 모두에 대해, 그녀의 작품(연구)과 복잡계 이론을 상호 참조, 교차 독해할 때 ‘김주현의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작가 김주현의 <복잡성연구>(작업) 방식, 즉 문제제기→법칙 고안 및 설정→(조각적) 증명을 복잡계 이론과 중복시켜 본론의 두 장에 걸쳐 추적한다. 그리고 그에 부속되는 별 개의 각 장을 설정하여 그러한 작품이 갖는 예술 비평의 논점을 논해 볼 것이다. 예컨대 1장은 작가 김주현이 결과적으로 하나의 조각으로 제시될 개념을 왜 그리고 어떻게 문제제기하는지 논한다. 2-1장은 작가가 작품의 개념을 조각적으로 증명(현실화)하기 위해 고안한 법칙과 그것을 어떻게 작품 구조 안에 설정하는지, 작가의 논리와 복잡계 이론을 들어 설명하고, 2-2에서는 그 개념의 예술 비평적 함의를 논하는 식이다. 이러한 비평 방식을 본인은 논문의 부제에서 밝혔듯이 ‘미학적이며 의사(擬似)물리학적 연구’라고 생각한다. 먼저 ‘미학적 연구’인 이유는, 김주현의 작품과 미술에 대한 태도가 예술보다는 학문에 가깝다 할지라도 여전히 ‘예술 비평 대상’인 한, 미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 ‘의사(擬似)물리학적 연구’인 것은, 김주현 작품의 이해를 위해서는 물리학적 접근이 필수적이긴 하지만, 미학을 연구하는 본인으로서는 복잡계 이론에 대해서는 비전공자로서 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 문제제기: 세계는 복잡하다. 어떻게 복잡한가?
김주현이 작품 <복잡성연구>를 시작하는 지점은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에서이다. 작업은 세계의 복잡함을 시각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복잡한] 세계와 그 안에 숨어 있을 질서와의 관계에 대한 탐구임을 나타내기”위해서이다. 작가의 이 인식과 탐구 목적은 세계가6) 우연의 결과라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한 우연이 아니라 어떤 규칙성을 갖고 있다는 아우렐리우스의 인식과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만약 세계가 원인과 규칙 없는 우연의 결과라면, 세계의 어떤 부분이 카오스인 것이 아니라 카오스가 바로 세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우주의 처음부터 끝까지 창조했든, 빅뱅이론이 주장하듯 태초의 대폭발로 시작됐든 간에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그것도 인간이 미처 다 알 수 없는 원리 아래 복잡한 본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다만 간혹 ‘현상적’으로 세계의 그러한 원리와 조우할 뿐이다. 실체나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현상으로서 만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복잡함의 저변을 흐르는 규칙 혹은 원리를 완전히 명징하게 파악할 수 없다.7) 세계의 어떤 본성은 초월적(transcendental)이고, 초경험적(metempirical)이며 선험적(a priori)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렇게 미처 다 알 수 없고 복잡한 세계에 대해 근대 자연과학은 한계를 설정하고, 단순하고 보편적인 법칙을 구성하려 했다. 말하자면 복잡한 세계를 단순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화된 세계는 세계의 가상적 모델이지, 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
복잡계 과학은 이러한 근대 자연과학에 부정적이다. 근대과학에서는 “복잡한 현상을 파악할 길이 없다. 잡음(noise)라고 해서 복잡성이 무시되거나...영구히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복잡계 과학은 “복잡한 세계를 복잡한 그대로 보고”, “질서와 혼돈 사이의 동적인 관계를 문제시” 8)하지만, “질서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며, 자발적인 질서를 도출하는 위대한 기질이”9) 복잡성 안에 내재해 있다고 본다. 앞서 인용했던 김주현의 진술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그러한 시각은 세계에서 질서를 구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세계 속에서 질서를 ‘찾아보고’, 그 ‘관계’를 추적해 보는 연구 방식을 필요로 한다. 본인은 이를 ‘복잡계 안 원리를 향한 충동’으로 본다. 이 충동은 태도 면에서, 충동의 목적 면에서, 근대적 이성이 주도한 요소 환원주의적10) 과학의 충동과는 다르다. 언뜻 복잡한 것에서 질서를 찾아낸다는 것, 원리를 지향한다는 것이 결정론인 요소 환원주의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자연을 기본요소로 나누고 그 기본요소를 재배치하여 재구성하는 요소환원주의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혼돈을 배제한 ‘질서’ 그 자체이다. 11) 이에 반해 복잡계 이론은 “질서로부터의 혼돈”(카오스 이론)과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자기조직화 이론)라는 슬로건에서12) 드러나듯 질서와 혼돈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문제시한다. 그러므로 ‘복잡계 안 원리’는 이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의미하고, 이를 향한 충동은 원리를 ‘구성’하는 충동이 아니라 원리를 현상들의 상호관계 안에서 ‘발견’하는 충동으로 이해되기를 바란다.
김주현은 세계는 무작위(random)에 혼란스런 복잡계로 보이지만, 그 계에는 무작위와 복잡성을 일거에 꽃피우면서(“창발”) 13)자기조직화 하는 원리, 그녀의 진술에 따르자면 “법칙”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복잡성의 법칙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의외로 단순하다. 작가는 자신의 전제를 충족시키고 증명하기 위해 단순한 법칙을 고안해 설정한 후 조각 작업으로 실행하였다. 이 실행의 과정에서 복잡계 과학이 “카오스의 가장자리(edge of chaos)”14) 혹은 “자기 조직화 임계성(self-organized criticality)"15)이라 명명한 복잡함의 최대 값이 발현되면서 작품의 복잡성을 창발 시켰다.

2-1. 법칙의 고안 및 설정 :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내기”
논의의 전개를 위해서 다음 도판들을 봐 주기 바란다.


a. 벨로소프-자보틴스키(Belosov-Zhabotinski)반응

b. <The Academy of Leonardo>,판화,16세기


c. 프랙탈(fractal) 이미지

d. 김주현, <5단계 도면>, 2004

도판 d만 빼면 모두 곡선이라는 공통점 외 이 4개 이미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 네 이미지의 중요한 공통점은, 복잡한 전체이미지에서 우리가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단순한 최소 단위 요소 이미지가 계속해서 반복되면서 일정한 공간적 패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도판 a는 <벨로소프-자보틴스키(Belosov-Zhabotinski) 반응>이라는 것으로, 몇 가지 단순한 유기 분자들이 참여하여, 촉매 작용으로 일으키는 “반응-확산 파동” 혹은 “화학적 파동”현상16)을 과학 실험용 접시(petri plate)상태에서 본 것이다. b는 시각 예술가 중 최초로 ‘아카데미’라는 용어를 사용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레오나르도 아카데미(Academia Leonardi vinci)≫를 기념하는 판화 이미지다.17) LEO-NAR-DI 등 분절된 단어를 중심으로 동일한 요소단위 곡선이 고리 져서 돌고 있는데, 일견 아주 복잡해 보이지만 패턴을 이루며 각 분절된 단어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다. c는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을 보이는 프랙탈(fractal)18) 이미지이고 d는 김주현의 <복잡성연구>에서 5단계로 진화한 모델의 도면으로서, 46개의 정사각형이 자기 조직화를 5단계까지 진행하면서 4777개 정도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과학자라면 이 4개의 예시 이미지 조합에서 ‘프랙탈’과 ‘자기 조직화’ 성질을 추출해 낼 것이다.19) 그러나 본인이 이 이미지 조합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프랙탈 공간패턴만은 아니다. 각각 원천을 과학과 미술에 두고 있으며, 만들어진 시기가 다른 이 네 이미지는 미술/과학, 미술가/과학자의 유사와 차이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중하게 선택된 예들이다. 이 예들로 앞으로 할 주장은, 김주현의 <복잡성연구>가 단순히 과학 이론의 모방이나 반사(reflection) 혹은 그러한 이론에 경사(傾斜)된 미술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과학이자 예술 창작(creation)이라는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먼저 <벨로소프... 반응>은 과학자가 반응 혼합물을 실험용 접시에 투입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유기 분자들이 만드는 자발적 현상으로, 과학자는 이를 우연하게 ‘발견’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원칙적으로 과학자가 화학적 파동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16세기 판화 <레오나르도 아카데미>는 우리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어느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가 세계의 어떤 형태도 직접적으로 모방함이 없이, 오직 ‘곡선’만으로 창조해 낸 예술작품이다. 프랙탈이든 복잡계 과학이든을 전혀 몰랐을 그 예술가는 이미 세계가 단순성에서 출발함에도 자기 유사성을 보이며 끊임없이 자기 조직적으로 증식해서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해진 것들로 충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 내에서 자신의 작품을 생성함으로써 세계에 약간의 복잡성을 보탠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본 주제인 김주현의 미술로 돌아가서, 그녀의 <복잡성연구> 이전 작품들을 살피기로 하자. <쌓기>, <경첩>작업들이 그것이다. 이들 작품은 창작된 시기가 중요한데, 김주현이 종이를 반복해서 쌓거나 직사각형 함석판으로 경첩을 만들어 작업하던 때, 그녀는 복잡계 과학이나 카오스 이론을 모르고 있었다.20) 그러나 이 작품들은 분명 과학의 논리를 증명하기에도 충분한 모델(조각 작품)이다. 예컨대 "폭 10cm 길이 110cm의 얇은 종이를 가운데 부분만 겹치도록 90도씩 회전하며 흘러내림으로 인해 더 이상 쌓을 수 없을 때까지 쌓는” 법칙을 설정하고 만든 <쌓기>(1998)는 앞서 각주 15번에서 소개한 자기 조직화의 모래산 모델과 논리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하지만 창조성에서, 그 미적 성질에 있어서 차이진다. 르네상스의 <레오나르도 아카데미>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미술은 거울(reflection)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성(creation)이다.
김주현 작업의 또 다른 예, <경첩>(1997-)은 계속 증식하고 있는 작품으로 144개로 시작해서 현재는 전체 22000개의 경첩이 연결되어 있다. 직사각형 함석판재이며 스스로 경첩이어서 또 다른 판과 연결되는 기본형 판재 4장이 결합한 한 부분의 윗면은 정사각형(격자)이 되는데, 판재의 제작과정에 약간 크기가 다른 변수가 끼어들면서 혼란상태가 되어버렸다. 경첩들이 연결되는 과정 중 크기가 2cm 작은 다른 변형 판재가 전체에서 13% 정도 끼어들면서, 조금씩 밀림현상을 불러 일으켰고, 밀림이 연쇄 중첩된 결과 <경첩>은 격자 판이 아니라 유기적 형태의 해안선 같은 형상을 취해 버린 것이다. 이는 즉각적으로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가 우연하게 발견한, 한 혼란스런(chaos)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일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인 나비에-스토크 방정식(Navier-Stokes equation)에 변수 값을 처음계산과 달리 소수점 몇 자리를 반올림한 후 계산한 결과, 프로그램이 자체적으로 소수점 이하 작은 차이를 제곱 세제곱해 버려 전혀 다른 결과를 산출했다는 것이 로렌츠의 사례다. 이는 과학자들이 “미분 방정식으로 기술될 만큼 정교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시스템이라 하더라도, 그 방정식에 비선형항이 포함돼 있으면 초기 조건에 민감하여 장기 예측이 전혀 불가능한...카오스 시스템”21)을 인식하게 된 사건이었다. 로렌츠의 사례는 김주현의 경첩 중 크기가 약간 차이 나는 것들이 초기조건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스스로 빚어낸 작품의 카오스에 그대로 적용된다. 게다가 그녀의 <경첩>작품은 외형상으로도 완전히 불규칙한 해안선이나 살아서 스스로 증식하는 어떤 유기체를 닮았다. 그녀는 이 <경첩>작품의 예기치 않은 결과, 그리고 그 작품을 전시를 위해 다시 설치할 때마다 달라지는 작품의 최종형상을 보며 작품이 창작자 자신의 손을 떠나 임의의 무한대로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논리는 바로 카오스와 복잡계 과학의 논리가 아닌가! 미술가 김주현이나 기상학자 로렌츠나 부지불식간에 카오스의 세계로 끌려들어갔고, 우리는 덕분에 카오스의 형상과 그 체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경우 미술가와 과학자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를 역사적으로 해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미술(beaux arts, Fine Arts)”이라는 용어가 고안되고 서구 사회에서 정착된 시기는 18세기 중엽이다.22) 이 시기부터 미술은 ‘시각예술’을 의미하는 한정된 개념이 된 것이다. 그보다 먼저 문화 전반이 부흥했던 르네상스시기에 미술은 공예와 과학과는 분리됐는데, 공예보다는 과학이 분리되는 과정이 더 어려웠다. 단순한 손 기술을 의미하는 공예를 분리시킴으로써 장인이 아니라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어 했던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또한 스스로 학자로 대우받고 싶어 했기 때문에 쉽게 미술에서 과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23) 그러나 이는 단순한 자의식에서라기보다는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추구했던 예술이 학문, 즉 과학의 영역에 겹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아카데미≫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 시기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교육이 도제 양성이 아니라 학문연구가 되기를 바랐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술작품과 연구 성과에서 보듯 예술의 관심 영역과 그 작업방식, 작품의 내용은 일정 부분 과학과 동일하다. 그래서 이미 <레오나르도 아카데미>에서 보듯 프랙탈 패턴이 미술 속에서 선취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미술이 ‘시각예술’로 한정되고, 현대에 들어 모더니즘 미학으로 미술이 보수화되면서 더욱 작가의 아우라가 강화되었던 그만큼, 미술은 여타 다른 삶의 영역으로부터, 세계로부터 물러나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김주현의 <복잡성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그녀는 시각으로 즐길만한 미술이 아니라 세계의 한 성질을 탐구하는 미술, 세계와 관계하는 미술을 추구하고 있으며, 주관성의 원천, 감정의 기원으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제기한 문제를 증명하는 실험자 혹은 과학이론과 미술 감상자를 매개하는 매개자로서 서고자 한다. 적어도 김주현의 <복잡성연구>에서는 과학과 미술이 그렇게 완강하게 분리되어 있고,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김주현은 <쌓기>와 <경첩>작품을 한 이후 비로소 자신이 추구하고 있고, 자신의 작품이 드러내 보이고 있는 어떤 속성―카오스적인 동시에 자기 조직적인―이 복잡계 과학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러한 이론을 적용해 가면서 이전 작업과의 연결 선상에서 하고 있는 작업이 <복잡성연구>이다.
작가가 처음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의문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으로 여겨지는 도형인 정육면체를 결합시켜 복합체를 만들 때, 그것은 얼마만큼 복잡해질 수 있을까? 정육면체가 점점 더해져 가는 과정 그 어디쯤에서 복잡성이 드러날까? 전체 형태가 아주 복잡해져서 완전히 다른 윤곽을 형성해도 여전히 그 부분이 정육면체임이 인식될 수 있을까?”

작품은 정육면체가 불규칙한 형태로 결합한 1단계에서 시작한다. 여러 정육면체가 하나의 구조로서 건축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덧붙여진 매개 정육면체(이하 변수라 지칭한다)를 포함해서 1단계 정사각형 면은 총 46개이다. 이 정사각형 46면을 가진 구조물이 최소 단위가 되어 작가가 설정한 법칙에 따라 수학적으로 증식하게 될 것이었다. 그 증식 법칙은 각 단계의 결과마다에 “임의의 수 3 곱하기를 실행”하는 것으로 아주 단순하다. 작가는 법칙을 적용하여 증식하는 과정을 “성장과정”이라 보고, 매개를 위해 끼어드는 변수를 그 과정의 “변화 또는 변이”라고 생각했다.

“1단계를 3개 만들어서 무게 중심과 균형과 밀집도를 고려하여 적당히 결합하면 2단계가 된다...3개의 1단계가 결합하다 보면 서로 닿는 면이 제거되기도 하고 결합을 위해 소수의 새로운 면이 추가된다. 이것을 성장과정에서의 변화 또는 진화의 변이라 생각하자...3개의 2단계는 결합하여 3단계가 된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여 5단계까지 한다.”

일견 곱하기 3이라는 단순한 계산을 수학적으로 반복해 가는 <복잡성연구>의 과정은 정육면체의 기계적 증가만을 가져올 것 같다. 그러나 애초에 1단계로 주어진 정육면체 결합 자체가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닫힌 형태를 띠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똑같은 것이 3번 방향을 달리 하고 변수가 이를 매개하며 결합된 2단계는 더욱 열린 형태를 띠게 된다. 똑같은 방식으로 단계가 3, 4, 5로 상승할수록 구조물 모형과 그 도면은 아주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즉 작가가 목적했던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 김주현의 <복잡성연구>의 마지막 5단계 결과물 중 하나인 시멘트 조각만을 보았을 경우, 그 복잡한 구조와 형태가 무작위로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멘트 조각의 외적 형태만으로는 그 구조물이 어떠한 원리로 구축되었는지 금방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5단계 모형과 시멘트 조각은 마치 포스트 모던 건축양식처럼 구조물 중심부가 불규칙하게 군데군데 뚫려 있고, SF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 도시처럼 밀집과 확산이 원칙 없이 한데 모여 있는 듯 하다. 그 복잡한 양상에서 1단계 모형으로의 환원은 그 전체 증식단계를 보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계의 복잡함에 대해서 그 원리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유와 같다. 즉 세계는 자신의 역사(役事|歷史)를 거꾸로 뒤집어 최초의 조건, 최초로 주어진 규칙을 우리에게 보여주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세계는 복잡성을 창발한 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졌고, 계속해서 자기조직화 임계점 언저리에서 그 창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김주현의 <복잡성연구>는 이러한 세계에 대한 연구이며, 단계들을 펼쳐 냄으로써 ‘세계는 복잡하다’에 복잡계 과학과 더불어 하나의 해(解)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2-2. 단순하게 복잡한(simply complex), 그 형용모순이 내재한 에너지와 창발
어렵더라도 사람들은 김주현의 <복잡성연구> 5단계 시멘트 조각을 보고, 그 상태로부터 어떤 결합의 법칙이나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낸 최소 단위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유추들은 애초 김주현이 시작한 1단계 모형으로 곧이곧대로 환원될 수 없고, 유추자에 따라 다양하게 상상한 가설의 유추가 된다. 이를 들뢰즈가 언어의 지시 작용에서 말한 의미의 “무한 역행 혹은 무한 증식(Paradoxe de la regression, ou de la proliferation indefinie)”에 대입해 보자.

“요컨대, 하나의 사태(김주현의 <복잡성연구> 5단계)를 지시하는 하나의 명제(이 조각은 아주 복잡하다)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 명제의 의미를 [그 명제를 논의 대상/지시 대상으로 삼는] 다른 명제(정육면체가 불규칙하게 붙어 있어 복잡하다/직선들이 여러 방향으로 결합되어 있어 복잡하다/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등등) 에 의해 지시되는 것으로서만 파악할 수 있다.”24)

말하자면 우리는 한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와 관련한 다른 단어를 동원해야 하듯이, 김주현이 드러낸 복잡한 사태가 어떤 원리로 생성되었는가 알기 위해서 그 작품의 어떤 성질을 대상 삼아 여러 다른 성질을 지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지시는 또 다른 지시를 낳을 뿐, 바로 그 원리로 환원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 역행’의 길이 열린다.
김주현의 <복잡성연구>가 최초의 1단계로 환원불가능하다는 점은, 단순한 법칙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성질 중 하나이다. 이렇게 단순한 법칙이 어떻게 그처럼 복잡한 결과를 냈는가? “단순하게 복잡한(simply complex)”은 김주현이 지난 2003년부터 해오고 있는 <복잡성연구>의 큰 제목으로 자신의 작업 주제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앞서 2-1장 법칙의 고안과 설정에서 인용한 가장 단순한 법칙으로 복잡한 구조를 만들어내기”를 함축하고 있는 “simply complex”, 이 제목은 분명히 형용모순이다. 그런데 이 형용모순이 우리로서는 아직 쉽게 파악되지 않는 낯선 미술을 촉발시켰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생각해 보기 위해, 일단 ‘simple’과 ‘complex’의 어원을 살펴봄으로써 이 단어들이 지시하는 의미를 추적해보자. simple과 complex는 “접다(to fold)를 뜻하는 plicare에서 한 번(sim) 접었다는 뜻의 simplex라는 말이 어미 변화하여 단순을 뜻하는 simple이 나왔고, plex에 com이라는 접두사가 붙어 두 번 이상 접었으니 복잡하다”25)를 뜻하게 되었다. 즉 simple이든 complex든 일단 ‘접는다’는 공통의 행위를 갖는데, 그 행위가 반복의 수에 따라 다른 의미로 분리된 것이다. 복잡계 과학의 이론적 바탕이 되고 있는 카오스 이론은 <파이반죽 변환>26)론으로 카오스를 설명하곤 하는데, 수많은 겹으로 이루어진 파이가 무수한 밀가루 반죽 층의 접기(sim-complex의 반복)의 결과라는 것, 그 반죽의 설탕 알갱이들의 움직임은 인간의 손놀림(변수)에 따라 불확정적으로 운동한다27)는 것을 생각하면 simple-complex-chaos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본인이 단순-복잡-혼돈을 이음표로 연결했듯이 이들은 simple-complex라는 형용모순 속에서 복잡계의 성질을 촉발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본인은 김주현의 <복잡성연구>를 포함해서 <쌓기>, <경첩>, <다체문제>작업을 포괄하고 있는 원리 중의 하나가 바로 이 “simply complex”라 생각한다. 또 이 형용모순이 김주현 조각들의 에너지이고 그 모순에 의해 작품의 복잡성이 창발 한다고 본다. 형용모순에서 ‘모순’은 변형|변태|변이 혹은 새로움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모순이기 때문에 의미가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를 부추김으로써28)‘낯선’ 결합을 일구어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히 분리되어 전혀 관계가 없거나, 피상적으로 결합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 되는 성질 때문에 서로 상호 작용함으로써 의미를 증폭시키고 다른 의미로 진행될 수 있다. 김주현은 이 형용모순에 대해서 언어적으로 사고한 것 같지는 않지만, 복잡성과 자신의 <복잡성연구>가 자기조직화를 통해 창발 하는 이유가 “단순하게 복잡한” 특성에 있다고 자각하고 있는 것 같다. “simply complex”라는 제목을 처음 쓰기 시작한 <다체문제>작품을 설명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복잡성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성에 대한 개념은 독립적으로 선택된 하나의 체계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측면이 아니라 두 개체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는 특성에 가깝다.”

앞서 적용해 봤던 들뢰즈의 논리처럼, 즉 언어의 의미가 무한 역행할 수 있는 이유가 언어간 서로의 지시작용에 있듯이 “단순하게 복잡한” 김주현의 조각은 한 작품의 내적인 요소들이 법칙의 실행단계에서 서로 상호 작용함으로써,29) 복잡성을 창발 한다. 그리고 발화된 단어에 있어 의미의 불확정성이 다양한 해석을 불러들이듯이, 조각적 해(解)로서의 결과물인 5단계 시멘트 조각은 최초 원리로 환원되지 않고―복잡함은 단순함으로 선형30)하지 않고― 불확정적 비선형임으로써 무한해 질 수 있다. 물리적인 조각 작품만이 아니라 그 해석의 의미에서도 말이다. 물론 내적인 요소들의 상호작용성이 끊임없이 변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의해 창발된 각 단계 구조물이 고정되듯이, 작가 김주현이 <복잡성연구>를 위해 설정한 최초의 단순한 법칙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3-1. 조각적 증명: 제기된 문제 ‘세계는 복잡하다’는 조각적 해(解)를 갖는다.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무심하게 피우고 있는 담배연기의 궤적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 한다. 또 북경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시카고에서 태풍이 불 수 있다는데, 그 무한한 경우의 확률조차 구하려 한다. 잠시 피어났다 사라지는 담배연기든 태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든 세계는 복잡한 현상으로 가득차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잡한가? 그 복잡성 속에도 어떤 원리는 있지 않은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그에 대한 해(解)를 구하려 할 것이다. 우리가 김주현의 작품과 함께 살펴보고 있는 복잡계 이론은 ‘세계는 복잡하다’는 이념(idea)에 대한 하나의 해(解)이다.31) 그런데 복잡계 이론이 세계의 복잡성에 대해 해를 냈다 하더라도 이념-문제제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들뢰즈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념들이야말로 해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고, 그래서 이 조건이 없다면 결코 어떠한 해도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32) 과학에서든 미술에서든 세계에 대한 문제(이념)가 끊임없이 제기될 수 있는 한, 하나의 해만이 아니라 또 다른 해도 존재 가능하다. 김주현의 <복잡성연구> 또한 그 해 중의 하나이다.
김주현은 자신의 조각 작업에 하나의 단순한 법칙을 설정하고, 작은 차이를 발생시키는 매개 변수를 끼워 넣으면서 단계별로 성장시킴으로써 복잡성을 창발 시켰다. 이는 우리가 복잡한 현상을 조우하고 그것이 어떤 원리로 이루어진 것일까를 추적하는 과정을 미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역으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녀가 <복잡성연구>에서 진행한 실험을 다시 한번 따라가 보면 이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이다.
먼저 정육면체들이 안정된 대칭형식이 아닌 불규칙한 방식으로 결합된 모형을 만든다. 46개의 정사각형을 가진 이 모형이 1단계이자 가장 최소의 단위가 된다. 이 최소단위를 3개 결합시킨다. 즉 46×3. 여기에서 결합 때문에 겹치는 부분의 면은 뺀다. -12. 그러나 최소 단위가 불규칙한 형태이므로 3개가 결합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이들을 매개시켜 줄 변수가 끼어든다. +33. 이렇게 하면 2단계 모형이 된다. 즉 2단계는 1단계 46×3-12+33=159개의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모형. 과정을 도식화 하면 이렇다.

1단계: 46개의 정사각형
x 3 -겹치는 부분의 면 12 개 + 추가된 면 33 개 =

2단계: 159개의 정사각형
x 3 -겹치는 부분의 면 24개 + 추가된 면 23 개 =

3단계: 476개의 정사각형
x 3 -겹치는 부분의 면 186개 + 추가된 면 89개 =

4단계: 1431개의 정사각형
x 3 -겹치는 부분의 면 204개 + 추가된 면 688개 =

5단계: 4777개(추정)의 정사각형

이 도식을 보면 겹치는 부분의 면과 추가되는 면은 법칙에 상관없이 임의적으로 증가/감소하고 있으며, 이것들의 수가 다음 단계의 수를 증식시키는데 아주 큰 변수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기상학자 로렌츠가 두 번째 계산에서 무시했던 소수점 아래 세 자리가 단지 미미한 수인 것이 아니라 전체 계산 결과를 첫 번째 계산결과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말이다. 김주현의 <복잡성연구>는 현재 5단계까지 진행되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쳐 각 단계 정사각형 면으로 이루어진 모형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 무한으로 증식할 것이다. 세계와 그 세계가 제기하는 이념이 끝없이 해(解)를 요구하는 한 말이다.

3-2. 반복과 차이 : 하나의 조각(a piece)이 무한한 조각(the sculpture)이 될 수 있는 방법
17세기 초, 까발리에리는 “모든 입체는 무한한 수의 평면들을 겹쳐 놓은 것”33)이라 했다. 그런데 이 말을 결국 모든 것은 원자에서 출발하며 전체는 그 합이라는 환원적 사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까발리에리가 말한 무한은 ‘나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고, 복잡계 과학이 강조하고 있듯이 “전체는 개체의 합 이상”일 수 있는 것이다. 2차원 평면이 무한히 겹쳐지면 3차원 입체가 된다는 것은 차원을 일도양단으로 결정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김주현의 <쌓기>작업처럼 이는 되돌릴 수 없거나 그 역행 방식이 무한한 진행이다. 이 진행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으로 비약해서가 아니라, 동일한 것의 영원에 가까운 반복이 연속적으로 이행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초기 혹은 어느 순간에 개입하는 미세한 변수가 차이가 되어 전혀 예측 불가능한 존재로 증식해 가는 것이다.
본인은 김주현 <복잡성연구>에는 ‘반복’과 ‘차이’가 중요한 내적 동인(動因)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동인을 수학적 과정의 기술(記述. 3-1장의 도식과 같은 방식)로는 충분히 드러낼 수 없음으로, 그에 더해 예술 비평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의 과정 중에 들었던 김주현 작품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김주현의 작업은 종이, 함석판, 시멘트 등 그다지 견고하지 않거나 고급하지 않아 조각의 재료로는 소외되어 온 물질을 써서, ‘정사각형’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반복해 나가는 작업이다. <쌓기>는 종이를 거의 무한 반복에 가깝게 쌓아가는 작업이고, <경첩>은 함석판재로 만든 경첩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연결시키는 것이며, <복잡성연구>는 표면적으로만 보면 정사각형(혹은 정육면체)의 반복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무엇인가 지루하게 되풀이 된다는 어감으로 ‘반복(repeti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똑같은 청원(petition)으로 되돌아 옴(re)’. 그 반복에서 청원은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며, 새롭게 생성되는 것 또한 없어 보인다. 그런데 보라. 까발리에리가 익히 말했듯이, 그리고 김주현이 0.1cm도 안되는 얇은 종이들로 <쌓기>라는 입체 조각 작품을 생성해 냈듯이, 무한한 반복은 평면을 입체로 탈바꿈(rebirth)시키고 평면을 부흥(renaissance)시킨다. 또한 <복잡성연구>가 그렇게 했듯이 결합된 반복은 복잡성을 창발(emergence) ? 출현(emergence) 시키는 두 방아쇠 중 하나가 된다.(다른 하나는 이후 논할 그 짝으로서의 ‘차이’이다) 창발은 반복에 의해 출현한다. 복잡계도 “복잡성이 증가하는 기본적인 원동력은 자기복제이다. 단순한 것을 복제해 내어 새로운 계층구조를 형성함으로써 보다 복잡한 것을 만드는 것이다.”34)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반복을 통해 자기 특성을 만든다.
김주현의 <쌓기>에서는 종이 한 조각(a piece)이, <경첩>에서는 경첩 판 한 조각이, <복잡성연구>에서는 정사각형 면의 한 조각이 반복에 의해 무한한 조각(sculpture) 혹은 바로 그 조각(the sculpture)의 길로 들어선다. 이 때 반복은 들뢰즈 식으로 이야기하면, “전치와 위장"34)의 반복이 된다. 전치와 위장의 반복은 데올로기화된 법칙으로 이해해야 한다)에 종속된 특수자들에 반하여 어떤 독특성을 드러내며, 법칙을 만드는 일반성들에 반하여 항상 어떤 보편자(이는 앞의 괄호에서 부정한 이데올로기 법칙을 넘어선 원리로 이해되길 바란다)를 드러낸다."36)
이 반복은 또한 세속 기독교 세계에 대해 전면전을 선포했던 니체가 주장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반복 즉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이다37). 영원회귀에서 우리가 새겨야 할 의미는 ‘똑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긍정의 무한운동에 있다. 긍정의 무한운동 중에 존재는 선별하고 새로 생산하면서 파괴한다. 세계는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의 ‘저편 세계’를 위해 포기되지 않는다. 세계의 복잡성 또한 알 수 없는 것, 잡음으로 치부되어 단순성의 원리 속에서 포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에 대한 의미규정이 김주현의 작업에서 반복이 생성의, 창발의, 세계의 원리를 향한 격발 장치, 세계 자체의 법칙으로서의 무한 역행인 근거가 될 것이다.
반복이 세계의 원리를 향한 격발 장치 중 하나라면, ‘차이(difference)’는 또 다른 방아쇠다. 우리가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주현의 <경첩>과 <복잡성연구>를 지금 현재의 카오스 해안선 형태나 복잡성의 조각적 증명으로 이끈 원인은 소수 개별적인 것들이 만드는 미세한 ‘차이’이다. 몇 개 경첩의 몇 센티미터 크기차이가 ‘만드는’ 차이. 겹쳐지는 면과 매개되는 몇 개 정사각형 면이 빼고 더해지면서 ‘만드는’ 차이. 이것이 바로 하나의 함석조각이 무한하게 이어질 수 있는 조각으로, 익명의 ‘정사각형’이 복잡성의 원리를 미술의 방식으로 증명한 바로 그 조각이 된 무시할 수 없는 차이이다. 차이는 차이를 만든다. ‘차이를 만든다’는 말에서 우리는 차이가 생산적인 것, 창조적인 것, 정적으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어떤 긍정적인 성질임을 감지할 수 있다. 모방의 방식으로 외부세계와 일대일 대응관계에 있는 동일성의 예술에서, 끊임없이 한 명의 작가에, 하나의 주제나 개념에로 환원해 가는 경전화 된 예술에서, ‘차이’는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그 예술에서 ‘차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차이가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더 이상 생성도 창조도 움직임도 없다. 만약 김주현이 세계의 복잡성을 재현하려 했다면, <복잡성연구>의 각 단계들은 전개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정사각형 면의 반복은 차이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거나 애초부터 반복과 차이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김주현의 조각에서는 ‘반복’은 재현(representation)에 대립한다. 재현에서 접두사 ‘재(再, re)’가 결정론의 환원으로서 동일자와의 관계 안에서 언명된다면, 김주현의 반복은 ‘차이’와 짝을 이뤄 같은 것이 임의적인 관계 안에서 차이지게 발현되기 때문이다. 복잡계 과학도 이를 알고 있다.38) 불일치가 계속해서 그리고 반복해서 임의적으로 작품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창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김주현의 조각에 대해 단언할 수 없고, 그 끝을 볼 수 없으며, 예견조차 불가능하다. 마치 우리가 세계의 현상들과 조우할 때처럼.

결론
우리는 사람의 심장이 1초에 한 번씩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정상인이 편안한 상태에 있을 때 심장박동은 규칙적이지만, 일단의 학자들에 따르면, 건강한 심장은 카오스적 박동운동을 한다고 한다.39) 그러한 주장을 한 학자들로는 Ary Goldberger, Chi-Sang Poon, Christopher Merrill 등이 있다.
학계도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라니 이제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같은 표현은 사라지게 될 것 같다. 또한 만약 이러한 주장이 맞는다면, 인간을 일종의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더욱 긍정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을 포함해서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불규칙적이며 유동적인 운동을 하고 있지만, 아무렇게나 굴러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이 이제까지 개발한 논리로는 충분히 해명할 수 없을 뿐이고, 우리가 끊임없이 그러한 운동을 하고 그러한 현상과 조우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그 논리와 인식의 빈 틈바구니에 상상력이 끼어들 수 있는 것이고,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현상화 하는 예술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견 복잡계 과학이론에 맞춰지거나 지극히 수학적 논리에 의해 구성된 듯이 보이는 김주현의 <복잡성연구>가 위치하는 곳이 미술인 이유도 여기 있다.(그러므로 우리는―김주현의 <복잡성연구>/김주현의 <복잡성연구>에 대한 본 논문―과학적인 방식으로 말했지만, 유감인지 다행인지 이 연구가 과학영역에서만 배태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질서정연하고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김주현의 <복잡성연구>나 <레오나르도 아카데미>판화, 그리고 자연의 복잡계 모델이나 프랙탈 패턴은 쉽게 발견되지 않으며, 40)만들어내기도, 그 특징을 정량화하기도 어렵다. 법칙이 없이 완전히 비논리적이거나 비수학적이어서가 아니다. 하나의 원리만이 선형적으로 단일하게 적용되지 않고, 단순한 여러 법칙들이 서로 상호 작용하는 원리가 비선형적으로 직조되기 때문에 김주현 <복잡성연구>의 복잡성, 복잡계 모델이나 프랙탈 패턴은 정량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김주현은 각 단계모형을 최종적으로는 시멘트를 사용하여 제작한 조각 작품으로 우리에게 제시한다. 각 단계 정육면체들이 부분들의 조합이 아니라 유기적인 결합인 것처럼, 그녀는 필름으로 된 거푸집을 모형과 똑같이 내부에서 모두 연결되도록 하나로 만들어 그 속에 액체 상태의 시멘트를 흘려 넣은 것이다. 그것들은 짙은 회색의 복잡한 구조를 가진 건축물(architecture)로 보인다. 어원적으로 원형(arche)의 기술(technik)인 건축(architecture)이 김주현의 <복잡성연구>에서는 최종적으로 도출된다는 점은, 그녀가 복잡성의 원리를 원형으로 추구하며 작업했다는 점에서 당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앞서 2장 2절에서 논했듯이 이 건축물만이 제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복잡하다고 경험적으로 인식하지만, 그러한 복잡성이 시작됐던 원리나 최초모델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이 말은 <복잡성연구>의 논외자 혹은 관람자일 뿐인 우리에게 김주현이 복잡한 모형과 시멘트 조각 작품을 제시함으로써 역으로 자신의 복잡성의 원리를 조각적으로 증명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미 각 단계 종이모형|도면|시멘트 조각 작품이 원리를 돌려본(simulating) 결과|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주현의 <복잡성연구>는 과정과 메커니즘은 숨겨진 채 입력과 출력만이 드러나는 ‘블랙박스’41)와는 전혀 다르다. 또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작가(author/artist)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개념을 절대적 형식(예컨대 조각/문학/음악) 속에 담으려 하는 ‘블랙박스 예술’과 다른 지평에 있다. 우리가 비행기의 블랙박스가 출력할 수 있는 말만 들을 수 있듯이, 우리는 작가만의 고유한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이나 추상적 사유를 작품화한 예술 앞에서 “서로 결합하고 반박”할 수는 없고, 일방적으로 “유일하고도 동일한 저자의 목소리”42)를 듣는다. 이와 달리 김주현은 이념을 제기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논증하는 과정에 복잡계 과학을 끌어들였고, 그 조각적 증명을 ‘발표’43)함으로써 비판과 논쟁의 영역으로 작품을 풀어 놓는다. 작가는 그 작품에 대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44)도 ‘창조자’도 아니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스스로 고안해 낸 법칙을 실행하는 충실한 종”이다. 왜냐하면 복잡한 현상으로서의 조각을 만듦으로써 김주현은 ‘복잡성의 원리’에 대한 조각적 해(解)를 구했지만, 각 단계의 복잡성은 요소들의 결합과 상호 작용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그 때 요구되는 변수들의 수(數)는 작가의 손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김주현 <복잡성연구>의 각 단계들은 스스로를 자기 조직화하면서 성장하고 있다. 세계는 복잡하다는 이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의 개념을 실재로 사용할 경우 그 내포된 의미는 무한으로 확장될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규정할 경우 의미는 단일한 지점에서 봉쇄된다. 예컨대 ‘세계는 이러 저러해서 복잡하다’는 하나의 개념을 복잡계 과학이 자신들만의 논리적 정리(定理)로 단언해 버릴 경우, 그것은 더 이상 실재 복잡계가 내포하고 있는 무한의 의미를 인위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이율배반에 도달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 개념은 김주현이 <복잡성연구>로, 본인이 그 <복잡성연구>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 어떤 미술로, 어떤 과학으로 끊임없이 차이를 두고 반복 ? 확장될 때 경험과 지각과 인식의 자리에 들어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복잡성과 더불어 김주현의 <복잡성연구>와 그에 대한 본 논문이 세계 안에서, 복잡성 이론에서 말하는 “창발”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1) 김주현의 작품론인 이 글을 논문형식으로 쓰게 된 이유를 밝히는 것이 작가의 작품과 그에 내재한 태도를 이해하는데 요긴할 것이다. 김주현은 <복잡성의 법칙에 관한 연구>를 미술계 안에서 결국 조각품이라는 결과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개념적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칙을 고안하여 조각적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술의 태도가 아니라 학적(學的) 태도이다. 그러므로 그런 학적 태도를 가진 미술에 접근하는 작품론 또한 일반적으로 재미없고 건조한 글쓰기로 인식되는 논문이라는 학적 형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2) 이러한 규정들은 미학에 있어 각기 모방론, 표현론, 형식론, 예술제도론에 귀속되는 대표적 정의들이다. 플라톤은 예술을 실재(Idee)로부터 아래로 세 번째 위치한 실재의 “모방(mimesis)”으로 보았고, 이는 이후 예술이란 외부 세계의 모방이란 개념으로 계승된다. “표현론”은 그 기원을 18세기 독일낭만주의에 두고 있으며, 20세기 영미미학자 크로체, 콜링우드에 의해 발전된 “예술이란 (천재적 예술가의) 감정의 표현”이라는 정의의 미학이다. 예술이란 모방도 감정의 표현도 아닌 “선과 색채의 관련성과 결합상태, 그리고 미적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그러한 의미 있는 형식(significant form)”이라는 “형식론”은 클라이브 벨이 주창한 미학이론이며, 예술은 예술계(art world) 내에서 “예술계 대중에게 선보이기 위해 창작된 인공물이며, 그 안에서 비평, 소통”된다는 “예술제도론”은 조지 디키의 미학으로, 그 정의에 따르면 미술작품은 예술계 내 전시물이다 .

3) 김주현, 미 간행 작가 원고에서 부분인용. 앞으로 작가의 논리와 의견은 이 원고와 본인과 작가와의 대화를 참조한 것이다. 뉘어 쓰기로 표기하겠다.

4) 물론 복잡계 과학이 결정론적 단순성 과학의 모든 것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계 과학은 단순성 과학을 하부구조로 삼아 보다 높이 건축되는 새로운 과학”으로 여겨진다. 장은성, 『복잡성의 과학』, 전파과학사, 1999, p. 57 참조.

5)복잡계 연구의 선구격인 <산타페 연구소(SFI)>에서는 “복잡계(Complex System)”가 아니라 “복잡성(Complexity)”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어 있다. 의미상 큰 차이가 없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내 과학자들은 “복잡계”를 더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예) 김승환, 「복잡계 과학의 도전」, 정하웅, 「복잡계 네트워크와 응용」, 두 논문은 복잡계 이론과 적용을 쉽게 개괄하고 있다. 제 9회 기초과학 문화포럼, 2002 참조.) 본 논문은 김주현의 미술 내적 고유한 발상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작품 제목의 “복잡성”과 변별하여 “복잡계”를 선택했다.

6) 서론에서 인용한 아우렐리우스의 말 속에서, 그리고 이 논문에서 지칭하고 있는 “세계”란 단순히 인간을 포함한 지구만이 아니라, 카오스의 세계까지를 포함한 우주 전체를 의미한다.

7) 복잡성 연구자인 스튜어트 카우프만은 “상세한 것들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일반적인 성질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복잡계에 대한 완전
한 파악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Stuart Kauffman, 『혼돈의 가장자리』, 국형태 역, 사이언스 북스, 2002, p. 38 참조.
8) 요시나가 요시마사, 『복잡계란 무엇인가』, 주명갑 역, 한국경제신문사, 1997, pp. 233-234 참조.

9) Kauffman, p. 22에서 인용.

10) ‘환원주의’란 최소 구성단위의 성질을 알면 전체 시스템의 성질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요소환원주의에서 “전체는 부분의 총화(總和)”지만, 복잡계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총화 이상”이 된다.

11) 장은성, p. 58를 참조.

12) 요시마사, p. 234에서 인용.

13) “창발(emergence)”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루이스(H. G. Lewis)가 철학에 도입한 용어이다. 그에 이어 동물심리학자 모간(C. Lloyd Morgan)이 이 개념으로 비약적인 생물진화를 설명했다. 복잡계에서 이 용어는 요소 환원주의적 원리나 공식으로부터 유도하거나 예견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화를 의미한다.

14) 값이 0. 273이고, 그 값을 경계로 규칙군이 안정상태에서 카오스 상태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지점. 이는 임계점에서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는 상전이(相轉移) 현상과 닮았다. 이 수치는 복잡계 과학 연구자 크리스토퍼 랭턴이 람다 파라미터(lambda 파라미터: 셀 오토마톤의 모든 규칙표에서 나온 공간의 행동을 규정하는 일종의 제어매개변수 혹은 행동의 지표가 되는 질서매개변수)라는 기준을 설정하여 복잡함의 질적 상태를 양적 상태로 변화시켜 얻었다. 보다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요시마사, pp. 114-118를 참조. 앞서 인용한 산타페 연구소의 스튜어트 카우프만은 복잡계가 카오스와 질서의 “카오스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 카오스의 가장자리 영역은 마치 생태계처럼, 혁신성과 안정성, 경쟁과 변혁의 장을 제공하는 절묘한 균형점이다.” 김승환, 「복잡계 과학의 도전」(2002) 참조

15) 물리학자 파 바크가 발견하고 명명한 자연 현상. 예컨대 평평한 탁자 위에 모래를 조금씩 지속적으로 부을 경우, 일정한 높이까지 모래산이 형성되다가 크고 작은 산사태가 일어난다. 이 모래산이 스스로 안정된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자기 조직화’되어 있다고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정성은 정적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모래의 흐름으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임계상태”로 간주한다. 요시마사, pp. 119-120. 이와 별도로 ‘자기조직화’현상은 물리학자 일리아 프리고진이 제창한 이론으로 “외부의 미세한 조절 없이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스스로 적절한 패턴을 만들어 내는 현상”이다. 이는 복잡계의 다양한 패턴 생성의 중요한 동인이다. 김승환(2002).

16) Kauffman, p. 97와 문성호,,『물질의 궁극원자 아누』,아름드리미디어, 웹 사이트 cowhiterose.net를 참조.

17) 기념 판화는 남아있지만, “레오나르도 아카데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자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Carl Goldstein, Visual Fact over Verbal Fi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pp. 78-80을 보라.

18) ‘fractal’은 수학자 만델브로트가 고안한 용어로 일견 아주 복잡해보이지만 나름대로 규칙성(완전히 같지는 않으나 유사한)을 가진 자연의 패턴(예컨대 인간의 지문, 해안선, 나뭇가지 등)을 설명하는데 유용
하다. ‘자기 유사성’은 “아무리 작은 스케일에서 들여다보더라도 미세한 부분들이 전체 구조와 유사한 구조를 무한히 되풀이 하고 있는 양상”으로 이것이 만델브로트가 말하는 프랙탈이다. 정재승, 『과학콘서트』, 동아시아, 2001, pp. 82-83 참조. 이 책은 프랙탈로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회화의 복잡성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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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혹은 4개 예시 이미지가 프랙탈과 자기 조직화를 증명하기에는 적절한 조합이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주현이 “무거운 짐을 진 수학자들에 비해서 나는 매우 가벼운 몸으로 미지의 땅을 탐험할 수 있다...비옥한 땅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찾아낼 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한 것처럼 미학자인 본인 또한 오직 수학적이기만 해야 하는 ‘증명’에서는 자유롭다.

20) 김주현이 자신의 논리가 복잡계 이론과 비슷한 주제이며, 자신이 설정한 규칙의 조각적 증명인 <쌓기>, <경첩>작품이 복잡계 과학의 이론, 그리고 그 모델과 일정한 상동성을 갖는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과학 이론에 자신의 작업을 접목한 것은 <다체문제>와 이 논문의 주제인 <복잡성연구>부터이다.

21) 정재승, pp. 78-79에서 인용. 카오스 계 이론에서 로렌츠의 논문 「결정론적 비주기적 흐름」은 고전에 속하고, 카오스를 논하는데 그의 사례는 빠지지 않는다. 보충 이해를 위해 요시마사, pp. 242-254 참조.

22) 16세기 프란체스코 다 홀란다가 시각예술에 대해 언급하면서 처음 사용한 단어이지만, 1747년 샤를르 바뜨가 『동일한 한 가지 원리로 귀결되는 아름다운 예술의 제 분야Les beaux arts reduits a un meme principe』에서 ‘미술(beaux arts, fine arts)’라는 용어를 쓰면서 오늘날의 의미로 정착되었다. W. Tatarkiewicz, 『예술개념의 역사』, 김채현 역, 열화당, 1986, pp. 35-45 참조.

23) Ibid., pp. 30-32 참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조각가(sculptor)라는 개념은 르네상스시대에는 없었다.”

24)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t, 1969, p. 41. 번역본은『의미의 논리』, 이정우 역, 한길사, 1999, pp. 87-88 참조. 인용문 중 괄호 안은 본인이 김주현의 작품으로 대입해 본 것이다.

25) 장은성, p. 78에서 인용.

26) 요시마사, pp. 51-53 참조.

27) “복잡계는 결코 안정상태를 바라지 않는다. 복잡계는 자꾸만 불안정상태로 나아가려고 한다. 생명은 복잡계의 대표적인 예...안정상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불안정한 상태는 필요할 때 그 불안정성을 이용해서 능동적인 적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장은성, p. 56를 참조.

28) 복잡성의 창발은 위에서 아래로(top-down), 아래에서 위로(bottom-up) 되먹임(feedback)운동함으로써 가능하다. 탑 다운과 보텀 업, 그리고 이러한 창발 과정에 대해서는 장은성, 58-60, 97-98, 요시마사, p. 156 등을 참조할 것.

29) “의미는 일련의 역설들, 이번에는 내부적인 역설들 속에서 스스로 전개되어야 한다.” Deleuze, 1969, p. 41.

30) 다음과 같은 설명이 선형/비선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선형이란 원인(독립변수)이 변한 만큼 결과(종속변수)도 변하는 것이다. 1차 함수는 가장 전형적인 선형함수이다. 단순성의 과학은 선형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선형성은 예측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즉 원인의 변화정도만 알면 결과가 얼마나 변할 것인지 함수식을 이용해서 쉽게 계산할 수 있다...그러나 여러분이 알다시피 주식시장에서 주가변화를 결정하는 법칙은 없다. 즉 주식값이 변하는 곡선그래프를 아무리 보아도 그것을 하나의 함수식으로 나타내지 못한다. 주식시장은 피드백효과가 있기 때문에 비선형적인 변화를 자주 보인다.” 장은성, p. 55 참조.
31) 이 때 해(解)는 각각의 복잡한 현상이 어떠한 원리로 복잡한가를 밝혔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세계의 복잡성은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복잡계 과학은 “단순한 본질들이 어떻게 결합하고 종합되어 복잡하고 현란한 생동감 있는 현상을 창조해내는지 관심이 있다.” 장은성, p. 14.

32) Gilles Deleuze,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pp. 369-372 참조.

33) Francesco Bonaventura Cavalieri(1598-1647)는 갈릴레오의 제자로 이탈리아의 수학자였다. 그의 기하학의 근간은 미적분법의 전신이라 할 <불가분량법(method of indivisibles)>(논문<불가분량의 기하학, Geometria indivisibilibus>)이다. 불가분량법은 그가 면적과 체적을 계산하는데 썼던 두 가지 원리로, 평면도형은 평행한 어떤 선분들의 무한집합이고 입체는 평행한 단면들의 무한집합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math.kongju.ac.kr 등 참조.

34) 장은성, p. 95에서 인용.

35) 들뢰즈, 2004, p. 19를 참조.

36) Ibid., p. 34.

37) “어떻게 이제껏 긍정되어왔던 모든 것에 대해 전대미문의 부정의 말을 하고 부정하는 행동을 하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하는 정신의 반대일 수 있는가, 실재에 대해 가장 가혹하고도 가장 무서운 통찰을 하는 그가, 가장 심연적인 사유를 생각하는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사유에서 삶에 대한 반박을 목격하지 않고, 삶의 영원한 회귀에 대한 반박조차 목격하지 않으며―오히려 모든 것에 대한 영원한 긍정 자체일 수 있는 근거를 하나 더 갖게 되는가” F. Nietzsche,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니체 전집 15』, 백승영 역, 책세상, 2002, p. 431. 영원회귀는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항구성인 ‘순환주기’와는 대립된다. 만물유전 속에는 반복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복잡계 과학에서는 인과율이 깨어지고 있다. 즉 똑같은 조건을 주었는데도 조금씩이나마 다른 결과가 나오며 때로는 확연하게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이것은 바로 복잡계 과학의 핵심개념의 하나인 창발성 때문이다.” 장은성, p. 106을 참조하라.

39) 그러한 주장을 한 학자들로는 Ary Goldberger, Chi-Sang Poon, Christopher Merrill 등이 있다.

40) “서양의 수학자들이 자연에서 프랙탈을 발견한 지가 40년이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정재승, pp. 97-98.

41) 앞서 1장에서 설명했듯이 환원주의적이며 기계론적인 과학은 세계의 복잡성을 잡음(noise)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논리적 설명과 증명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복잡성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블랙박스’처럼 입력과 출력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실제 과정과 메커니즘은 불문으로 해두는 것이다.

42) Roland Barthes, 「저자의 죽음」,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1997, pp. 27-28 참조.

43) 여기서 ‘발표’는 학계에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 형식을 빌려 발표함으로써, 토론과 비판의 과정을 거쳐 검증되는 것과 같은 성격의 ‘전시(드러냄, exhibition)’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44) 경제학의 시조로 인정받는 A. 스미스가 한 말이다. 그는 저서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국부론)에서 모든 경제 주체가 건전한 사회제도의 배경 하에서 사전 조정 없이 각자의 이기심에 따라 경쟁을 전개하면, 시장기구라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국민경제 전체에 질서를 가져오고 부(富)와 번영을 이루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논리는 경제가 합목적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면서도, 경제 주체가 어떻게 경쟁하고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일종의 블랙박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