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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꾸는 꿈, 2009    
누구나 꾸는 꿈
2009

김주현




 
목차

1부 꿈

그림 안에서 나를 찾는다
그림을 그리면서 깨닫는 한 가지
그림 그리기
털을 그리며
털 그림을 그릴 때 주의할 점
반복
비가 온다
작업을 하는 이유
보통 사람들
그림은 결국 마음을 전하는 일
그림을 그리다가 떠오르는 생각
세밀화 감상법
미술관에서
선물
다른 사람의 작품을 따라하는 것에 관한 관대한 의견
지하철에 많고 많은 우리뷔통을 보면서 화나는 기분으로
예술이라는 직업
용서

꿈을 가진 사람은 꿈을 좇아 행동한다
9월 24일
All You Need Is Love
널뛰기

2부 나무를 따라 그린다는 것

나무를 따라 그린다는 것
뿌리
봄의 편지
새덤 삽목하기
식물의 집을 꿈꾸다
집의 크기
화분
초록이 그리운 도시
건물을 녹화하는 방법 1
건물을 녹화하는 방법 2
다가구 전원주택
도심의 자투리 땅을 이용한 농기구 창고가 있는 계단식 농장
사람과 동식물을 위한 보행전용 다리
생태다리
육교 공원
산책
양구 평상 설치 일기
겨울

3부 조각으로 연애하기
어릴 때
둥글게 둥글게
미쳤어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나이 먹기
밤 까기
생득조건으로서의 성
육아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기
예쑬에서 경쟁의 의미
열정에 대하여
열정의 씨앗
열정의 나무
열정의 샘
열정의 불꽃
열정의 열매를 나눔

글을 마치며
 


_ 글을 마치며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이 곧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기는 하지만, 작가가 작품 아닌 자기 자신을 직접 보여주는 글을 발표하는 데에는 결심이 필요하다.
오래 전 경첩작품에 ‘무제’라는 제목을 붙일 정도로 작품 설명에 인색하던 내가 학생과 일반인을 상대로 작가와의 대화를 강요받은 적이 있다. 소심하고 편협하던 나는 작품을 만들어서 보여줬으면 되었지 무슨 작품 설명을 하란 말이며, 도대체 사람들은 왜 구태여 미술을 알려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현대미술은 과거의 감상용 미술작품과는 달리 고도의 특수화된 전문 분야다. 현대미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지식과 특별한 감상 훈련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왜 현대과학의 어려운 원리와 수식은 모르면서 유독 미술만큼은 알 권리가 있는 양 행세하여 바쁜 작가를 귀찮게 하는가 말이다.

그런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정으로, 전시 기획자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경첩 작품에 대해서 몇 마디 설명을 하던 자리에서, 나는 참 놀라운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볼 일 없을 것이 틀림없는 낯선 사람들의 얼굴에서 더 할 수 없는 친밀감을 느낀 것이다. 내 설명을 열심히 듣던 사람들이 작품과 작품을 제작한 나의 마음에 공감하며 바로 이런 설명이 필요했었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작가가 작품을 매개로 다른 사람들과 교감한다는 것을 체험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흔히 전시를 하면서 평론가에게서 서문을 얻어 싣거나 작가노트를 적은 도록을 만들어서 관련자들에게 보내곤 한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설명은 다른 작가들이나 평론가, 기획자와 같은 미술계 전문인들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작품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는데 작가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것임을, 내 작품은 나와 내가 아는 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나는 그날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작품을 완성하는 것에 못지않게 작품을 설명하는 글쓰기에 열심이다. 글쓰기는 강제 일기 검사가 없어진 중학교 때부터 지금껏 내내 하는 것이라, 나에게는 그냥 숨을 쉬거나 생각하듯이 익숙한데, 이제는 전처럼 혼잣말이 아니라 나를 포함하는 모든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라 여기며 글을 쓴다. 그 전까지 나의 작품이 순전히 내가 하고 싶은 것만을 하던 데에서 모든 사람과의 대화가 된 것처럼. 예술이 작품을 매개로한 소통이라는, 대학 초년생들도 다 아는 사실을 나는 이렇듯 한참 다른 곳을 헤맨 뒤에야 알았다.

지난 3년간 작업하면서, 살면서 간혹 강연을 위해 쓴 글을 모았다. 대부분은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적은 것일 뿐, 책으로 엮을 의도로 쓴 글은 아니다. 만약 그 자리에 공책과 연필 대신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면 그냥 수다를 떨면서 흘려보냈을 만큼 가벼운, 구태여 글로 정리할 내용도 아닌 것들이다. 별다른 주제 없이 사견에 불과한 일상의 단상을 모은 이 글을 읽으면 작품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 이외에 아마 조각가 김주현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통해서 의견을 발표하는 데에는 무척 적극적이지만 사람들 앞에 직접 나서기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이처럼 일상을 담은 글을 공개하는 것은 노출증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그만큼 이제는 나의 삶과 작업이 하나가 되어서, 그토록 고기를 즐겨먹던 내가 왜 채식주의자가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고서는 왜 작품의 제목이 ‘생명의 그물’이며, 그냥 두면 더 멋질 수도 있는 작품에 왜 식물을 심고 그것을 다리로 만들려 하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작품의 규모로 미루어보아 내가 카리스마 있는 작가이기를 기대하며 인터뷰하러 온 분이 너무나 일상적인 보통 아줌마인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적이 있었다. 어떤 강연에서는 현대 과학과의 난해한 연관성을 기대하며 긴장했었는데, 너무 쉬운 이야기만 해서 안심했다는 분도 계셨다. 작품과 내 이름만 가지고 나를 씩씩한 남성 작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내 속의 욕심이 작품을 그렇게 부풀리는가 보다. 그러나 나는 별다른 야심이 없는 소박한 작가이며, 나의 작업은 내세울 만한 사상을 구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경험을 기록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가 일기에 가까운 글을 공개하는 것은 내 작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하려는 의욕과 더불어, 작품이라는 것이 대단히 특별하게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 물론 여전히 위대한 천재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나처럼 작은 종지로 타고난 사람이 온갖 어리석은 과오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거듭하면서 자기 그릇을 채우려는 노력의 결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나와 엄마의 이야기는 꼭 나와 내 어머니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모든 딸과 모든 어머니들의 이야기이며, 나라는 작가는 구태여 김주현일 것 없이 어느 한 무명인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누구나 느낄 법한 감성이고 누구나 꿀 수 있는 꿈이기에, 그 꿈을 함께 나누고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야기책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