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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사회 강연
2008

김주현


1. 생득 조건의 하나인 성
2. 인생게임에서 성의 의미
3. 차별의식
4. 성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가- 여성의 임신과 양육
5. 여성 예술가로서 성공하기
6. 여성으로서의 삶이 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작품 소개
결론 및 요약

 
<참고자료>

기하학의 가장자리 : 세 여성미술가들의 작업
The Margin of Geometry : The Works of Three Women Artists
/윤 난 지 Yun, Nanjie
생명과학과 선 / 우희종 / 미토스 p62~67 ‘차이와 차별’
예술과 과학의 만남 / 김주현 / 스튜드오 바프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스티븐 로즈 외/ 한울
본성과 양육/ 매트 리들리 /김영사
 

1. 인생은 게임이다. 사람은 이런 저런 카드를 손에 쥐고 태어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지역, 누구의 자식으로 태어날 지, 여자일지 남자일지, 예쁠지 흉할지, 영특할지 멍청할지, 건강한지, 병약한지, 형제 관계가 어떨지. 부모가 부자일지 가난할지, 격 있는 집안일지 아닐지가 카드에 적혀있는 것이다. 삶이라는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의사대로가 아니듯이, 처음 받은 카드의 내용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다. 만일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평화로운 부자나라에 좋은 집안에 훌륭한 몸을 갖추고 태어난다면 이 얼마나 복된가. 실제로 생득조건으로 받는 카드 패는 심하게 한쪽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부자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부자는 예쁘고 머리 좋은 배우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므로 건강하고 잘생기고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둘 확률이 큰 것이다. 생계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집안이라면 학문에 정진할 여유도 있을 것이니 격 있는 집안이 되기도 쉽지 않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시작은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세상은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시작이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인생은 게임이다. 게임이란 각자가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게임에는 우리가 받은 카드 패의 내용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0이라는 것이다. 살다보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든지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데, 지형이 제각각이어도 물의 높이가 일정한 것과 같은 원리이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 난 사람은 어려서부터 관심을 받기 때문에 그만큼 내면을 가꾸어 성숙한 자아를 갖추기가 어렵다. 지나치게 눈에 띄는 외모는 인간관계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오히려 못난 사람은 자신의 못남을 보충할 요소를 열심히 개발한다. 일을 더 잘하든지, 더 친절하든지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나이가 들면 인간의 타고 난 외모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어려서 뛰어난 외모만 믿고 꼴값을 하다가는 나중에 큰 낭패를 보는 수가 있다. 그래서 미인은 박명이라 하였다.
남보다 좋은 머리를 타고 난 사람도 자신의 머리를 믿고 자만하는 경우가 많다. 거북에게 지는 토끼가 되기 쉬운 것이다. 두뇌란 타고난 것 못지않게 평생을 두고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스티븐 로즈 외/ 한울) 남보다 뛰어난 암기력이나 이해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학문연구나 창의적인 일이나 인생의 깊이를 깨닫는 데에 쓰지 않고 잔꾀만 부린다면 그 머리가 사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머리가 좋은 사람은 노력하지 않고 잘난체하는 성격만 굳어져 오히려 인간관계를 망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부잣집에 태어난 사람은 죽었다가 깨어도 자수성가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을 모르는 사람은 나태해져서 실패할 확률이 크고,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자기 힘으로 일어나 성공한 사람들이 느끼는 자립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다. 잘되어봐야 부모의 그늘에 머무르는 것이다.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이 몸의 소중함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어 쉽게 병드는 것도 흔한 일이다. 아픔을 모르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은 어차피 언젠가는 모두 아프고 망가진다는 것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성공하는 만큼의 노력을 건강한 사람들이 할 수 있을까? 절대로 못하리라.
어떤 몸을 가질래하고 물으면 누구나 성공하지 않아도 좋으니 건강한 몸을 택하겠지만, 성령 불공평하게 불편한 몸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그 몸의 한계를 극복할 노력을 할 기회가 함께 주어진 것이니 좌절해서는 안 된다. 다만 노력을 할지 안할지의 여부는 바로 게임을 실행하는 당사자의 선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게임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봐야 결말을 안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신뢰와 노력이 생득조건보다 중요하다.

2. 性은 위에 열거한 여러 생득조건 중 하나이다. 그런데 다른 조건들과 달리 어떤 성의 좋고 나쁨은 확실히 구별되지 않는다. 남녀 성차별이 아주 심한 사회에서 조차도 무조건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시대, 사회,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판단될 것이기 때문에 성의 차이 자체만으로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만큼, 성차별은 전적으로 사회적 편견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편, 늘 마시는 공기와 물의 소중함을 평소에 잘 느끼지 못하고, 부모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고 자란 사람이 그 사랑을 당연히 여기거나, 지독한 실연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을 아는 것처럼, 우리는 흔히 어떤 것의 가치를 그것의 결핍을 통해서 깨닫는다.
그렇다면 평소에 우리가 어떤 일을 얼마나 생각하며 지내는가를 보면 그것이 얼마나 결핍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추론에서 최근 주변 학생들에게 자신의 성에 대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얼마나 자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는지를 물은 질문에 많은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성에 관해 문제를 느껴본 일이 없다고 답한 것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남녀 차별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리라. 다행히 현재 우리 사회가 일부 극단적인 여성차별지역에 비하면 제도적으로는 상당히 평등하다고 보나, 자신이 여성인 것이 불만인 나머지 남성처럼 행동하는 남성 지향적 성향을 보이는 것이나 여성이어서 불편한 수많은 일상적인 상황에 못지않게,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신이 여성임을(또는 남성임을) 강조하는 것도 역시 심각한 남녀차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장 바람직한 성의식은 성이 관련되는 분야가 아닐 때에는 성을 의식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엄청난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우리에게 성이 절대적인 역할을 할 일이 뭐가 그리 있을까.
실제로 인생에서 성이 비중을 차지하는 시기는 남녀가 배우자를 찾아 연애하거나 자식을 낳아 기르는 동안이며, 생식의 의무를 대신할 수 없으므로 이때에만은 성의 역할 분담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외에 현대의 인간 사회에서는 성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어있는데 많은 경우에 여성에게 좀 더 억압적인 구속으로 작용하는 이러한 현상은 차별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3. 차별에는 인간을 여타의 종으로부터 구분하는 종차별에서 시작하여 인종차별, 민족차별, 성차별, 종교차별, 계급차별을 비롯하여 잡다한 외모차별, 출신차별에, 하다못해 어린 학생들 간의 학급 내 차별까지 여러 종류와 규모가 있다. 차별은 나 또는 내가 속한 것과 나 아닌 것을 구별하는 것과, 내가 남보다 우위에 있거나 있어야한다는 의식에 기인한다. 차별의식은 일종의 믿음과 같아서 차별의식에 젖은 사람은 아주 정당한 권리와 의무인 양 자신의 믿음을 주변에 강화하고, 이를 행사하기 위하여 차마 상상하지도 못할 잔인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모든 개인이 서로 다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듯이 집단, 사회, 민족, 성, 종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나와 남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과 달리 차별의식에는 가치관이 개입하는데, 결국 차별이란 자신이 가진 주관적 가치관으로 우열과 선악을 판단하는 것이고, 이 믿음을 근거로 남을 심판함으로써 폭력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생명과학과 선 / 우희종 / 미토스 p62~67 ‘차이와 차별) 누구나 알고 있듯이 가치관이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바뀌는 것인데, 이를 근거로 차별을 행사해서야 되겠는가.
더욱 편협한 것은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닫힌 범위이다. 그것이 한 개체를 의미하든, 그 개체가 속한 범위를 지칭하든, 나라는 속성이야말로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적응해나가는 열린 관계인데, 그것을 일정한 범위에 한정시키는 것은 타자에 대한 차별이기 이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구속이기도 함으로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될 수 없다.
여러 가지 차별 중에 성차별은 가장 구분이 모호하고 그 성격을 단정 짓기가 힘든데,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 대로 성은 가치의 우열을 단정 지을 수 없고, 성차별에 있어서는 남녀가 간단하게 차별의 주체와 대상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간단히 하기 위해 각 사회 간의 성차별 정도의 차이는 무시하기로 한다. 여성의 가장 큰 적은 여성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실제로 남녀차별의 피해자가 남녀 모두 임에도 불구하고, 여성학이라는 개념은 그것을 완전 남의 일로 여기는 남성들에게 뿐 아니라, 자신은 그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많은 여성들에게도 외면 받는 듯하다.)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변수 중의 하나인 성을 기준으로 하여,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을 한 데 묶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모든 여성을 하나의 여성으로 통일시키는 여성의 개념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역시 여성을 남성과 구분하는 확실한 기준은 역시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임신과 육아는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4. 보통 예술가가 다 그럴 것인데 나는 성장기와 젊은 시절에 남과 다른 나만의 정체성을 확보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보고 느낀 것만을 사고와 감성의 근거로 삼았고, 작품을 위해서라면 어떤 투자와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한 번도 내가 스스로 자식을 낳아 키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무책임한 상태에서 막상 임신이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주변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질타와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 어디에선가 폭발적인 기쁨과 아이가 생기는구나! 하는 기대가 넘쳐흐르는 것이었다. 이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것이었다. 생물학 책에서는 이러한 감정의 변화의 원인이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라는 호르몬의 영향이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임신과 함께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임신과 출산이 나에게 준 영향은 다음과 같다.
1. 내 안에서 타자를 길러내다- 나의 영역을 이루던 강력한 경계가 무너짐.
자식이라 참 이상한 존재이다. 내 몸 안에서 내가 아닌 생명이 자라고, 나와서도 수년간을 붙어 지낸다. 내가 가진 온갖 상식을 다 동원해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저 놈이 나란 말이야, 남이란 말이야? 내 몸에서 남이 발생한다는 이 신비한 몸의 체험은 정신적으로 이해하는 나와 남의 개념과는 참 다르다. 물리적으로는 출산과 함께 몸이 분리되지만 자식의 몸이 나와 심리적으로 분리된 것을 느끼는 것은 10년 정도가 더 흐른 뒤였다. 그 후에도 자식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완전히 나에게서 독립하기까지는 출산 후 최소한 20년은 잡아야한다.(개인주의를 내세우는 서양의 교육법은 독립심을 강조하여 이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자식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하는데, 나는 이것이 반자연적이며 이런 아이는 평생 정서불안, 애정결핍증을 보일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때가 되면 자기가 알아서 독립한다. 그 이전에는 아이들이 필요를 느낄 때면 부모는 늘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한다.)

2. 내 몸의 가치를 알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됨.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발상이지만, 당시 엄격한 교육의 영향인지, 자발적인 사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신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육체적 행위와 몸을 사용하는 분야의 일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졸던 어느 날, 나는 비로소 나의 몸이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으면서 스스로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했던 어떤 다른 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식을 기르는 것은 그야말로 기고만장할 만한 일이다. 그 이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삶의 의미와 내 몸의 가치를 알 수 없었는데, 자식을 낳아 기르는 생식의 의무를 담당하고 나서야 내 삶의 의미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 생명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로구나. 그래서 내 몸이 소중하구나.

3. 제 2의 인생을 되살다- 아이에게 내가 소원하던 어린 시절을 선물함.
자식을 기르는 사람이 누리는 축복 중 하나는 제 2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생득조건을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울 때에는 자식에게 조건 중 일부를 마련해 줄 수 있다. 현명한 부모라면 자기 아이에게 가장 적절한 육아환경을 마련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부모의 계획과 바람대로 아이를 키우라는 말이 아니다.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면 그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금세 알 수 있다. 나의 경우 우선 아이가 성장한 후에 부모의 사랑에 결핍을 느끼지 않을 만큼 충분히 사랑하는 것과 때가 되면 아이가 완전히 독립할 수 있도록 자립심을 기르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그런데 아이를 실컷 사랑으로 키우다가 보니, 그 동안 내가 나의 부모에게서 느껴왔던 애정결핍증이 완전히 치료되는 효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의 옹알이를 따라하고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며 지내는 동안 전적으로 아이의 시각에서 세상을 새롭게 경험하였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신기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투성이였는데, 그 때까지 나는 작은 것들을 보는 눈을 닫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는 십여 년을 나도 함께 재성장한 것이다. 그와 함께 나는 내가 바라던 어린 시절을 되살 수 있었고 비로소 나의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단, 부작용에 주의해야한다. 아이들은 매우 빠르게 성장한다. 아이들의 말투나 시각을 따라하다가 오히려 아이보다 어려져서 엄마는 유치하다는 빈축을 살 수 있다.)

4.자식은 인격수양용으로 하늘이 내리신 선물이다- 자식을 키우면서 인격이 조금도 수양되지 않았다면 자식을 헛 키운 것이다.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은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시간적, 금전적 투자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뒤로하고 먼저 자식을 돌보는 것으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성숙한 이타주의를 경험할 수 있다.(자식을 전적으로 자신의 소유물, 연장으로써 인식하는 경우에는 그러나 별 소용이 없다.) 나는 자식을 키우면서 그 자체로도 너무나 즐거웠고 얻은 것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들인 어떤 투자도 희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이가 어리고 예민해서 밤마다 깨어 우는 바람에 5~6년을 만성 수면부족으로 허덕였던 것이며, 형편이 어려워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미숙한 솜씨로 살림과 육아를 전담해야 했던 것이 너무 끔찍한 기억으로 남는다. (내 경험상 햇가족은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좋지 않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또, 아이들은 간혹 부모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도 한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서 기어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자주 있을 수 있는데, 육아책에 쓰인 것과 같이 이 순간 화를 내지 않고 아이를 타이른다는 것은 운전을 하면서 화내지 않은 것만큼이나 어렵다. 생각해보면 이런 화는 자기 자신에게 내는 것이다. 비록 눈 깜짝 할 사이이지만 아이가 위험에 처하거나 사고를 일으키는 것은 결국 나의 소홀함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란 원래 말을 듣지 않는다. (너무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많은 부모는 아이를 나무란다. 아이에게 화내지 않으면서 아이를 자발적이면서 동시에 예의바르게 키우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완벽한 인격을 갖춘 부모만이 할 수 있는. 그러므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아이가 조금 성장하면 이런저런 성과를 무리하게 요구하는 부모도 많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스스로 본을 보여라. 자식에게 공부하라고 하고 자신은 TV를 보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부모의 할 일은 자식에게 잔소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자식 덕분에 공부를 하게 생겼으니 이 역시 인격수양이 아니겠는가. 자식이 아픈 데 없이 건강하고 밝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한다. 부모가 매일 할 수 있는 감사와 만족의 수양이다.

5.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다- 나의 영역이 한없이 넓어진다.
아이를 낳아 기르기 전까지 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지독하게 혐오했었다. 어린 아이들은 특히 내가 제일 싫어하던 대상이다. 그런데 내 아이가 생기자 별안간 모든 게 변하였다. 내 아이 뿐 아니라 그 또래의 아이들을 모두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커가면서 내가 관심을 갖고 눈을 마주치며 웃는 아이들도 점차 많아지고,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 이미 대학생을 포함한 모든 학생들이 다 내 자식과 같은 것이다. 이에 따라 걱정도 많아졌다. 어린 아이가 화장을 하고 교복치마를 짧게 올려 입은 걸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공부한다고 잔뜩 가방 메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을 봐도, 무단 횡단하는 아이를 봐도 그렇다. 내 자식만 잘 키워서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은 도대체 누가 하는지 모르겠다. 내 자식을 사랑으로 정성껏 키운 사람이라면 남의 자식도 똑같이 소중하다는 걸 모를 리 없건마는, 이렇게 참견을 하다 보니 결국은 교육정책, 사회 정치에 관심을 두게 된다. 다른 사회의 여성과 교육문제 뿐 아니라 야생동물과 가축, 인간에 의해 파괴되는 생태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임을 자식을 키우면서 겨우 깨달았다.
이렇듯 양육은 자아와 타자를 결합하고 자신의 삶을 교정하며 성숙한 인격을 수양할 기회를 제공한다. 위대한 어머니의 상이란 단순히 자기 자식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할 뿐 아니라 소박한 양육의 경험을 통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다 껴안는 마음을 지닌 그런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리라.

5. 세상의 중심을 나에게로-여성 예술가로서 성공하기
나에게 있어서 결혼과 출산은 진정한 남녀평등을 실천하기 위한 하나의 도전이었는데, 자신의 일에서 성공하기 위해 결혼 생활을 포기하는 여성이 많은 반면, 남성은 결혼 뿐 아니라 자손을 남기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현실에 분개하여, 나는 일과 가정을 모두 성공적으로 꾸림으로써 참된 성공의 의미를 세우겠노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매우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로서 늘 그 대가를 비싸게 치르곤 한다.) 전 육아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내가 아이를 키우는 동안 다른 작가와의 경쟁에서 뒤쳐져 낙오된다는 것이 너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자립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내가 스스로 마련한 척박한 환경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던 나의 결정은 어중간하게 육아와 작업을 겸하느니 아예 그림 한 장 그리지 않고 내가 작가라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자는 것이었다. 작업은 나중에 언제고 다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는 기간은 바로 지금 뿐이므로. 이것도 남녀평등을 실천하는 의미에서, 남자들 군대 간 셈 치고 꼭 3년 전적으로 육아에 몰입하여 사회적 의무를 다하겠노라고 자신을 달랬는데, 웬 걸, 3년이 아니라 5년이 지나도록 나는 제대할 수 없었다. 겨우 아이를 유치원에 보낸 후에도 나만을 위한 시간은 고작 하루 두 세 시간뿐인데다가 집중력이 떨어져 일의 능률은 반의 반으로 떨어졌고, 이러한 비능률적인 삶의 패턴이 좀처럼 이전으로 돌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혼은 몰라도 여성이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와 꼭 붙어 지낸 십년 간 곰곰이 생각했다. 역시, 아이를 가진 여성은 안 되는 것일까? 그 동안 철이 들었는지 나도 조금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도저히 아이를 들쳐 업고 홀몸인 작가들과 경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일을 위해서 아이를 조금이라도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한 편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당당히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성공이란 뭐지? 성공은 왜 해야 하는데?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인가? 혹시 내가 인생에서 성공의 의미를 지극히 가부장적인 남녀불평등의 사회에서 마련된 틀에 맞추어 생각해 온 것이 아닐까? 누가 아이를 가진 엄마를 성공하지 못하게 하는가?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까지 일할 것을 요구하며 그럴 수 있는 사람들만을 일꾼으로 수용하는 사회 구조이다. 그러나 나는 내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나만의 성공을 추구할 수가 없었다. 만약 기존의 세계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나의 기준으로 새로운 세계의 틀을 다시 짜자. 훨씬 더디고 약하게, 그리고 적게 연하고 흐리게, 그러나 그것들이 조금씩 모였을 때에는 그 결과가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되리라.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일 년에 꼭 한 작품만 한다. (마치 여성이 한 아기를 낳듯이.) 이렇게 해서 20년 뒤면 나는 틀림없이 좋은 작가가 되어있을 것이다.

6. 작품 소개
<생략>

결론-성공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성공은 우리가 아는 모든 세속의 가치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의 틀을 짠다. 더 큰 꿈을 가지자.
예술은 경쟁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것은 다른 분야에서와 똑같이 경쟁으로 보일 수가 있다. 성공을 위한 경쟁에서는 작업을 생산하는 것 이외의 활동들이 필요하다. 내가 미술가가 된 것은 이 분야가 비교적 인간관계와 무관하게 자신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는데, 이것은 전혀 옳지 않은 판단이었다.(그나마 조각이나 회화는 작가가 작품 뒤로 숨을 수가 있긴 하다) 아무리 소극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예술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적 발언이어서 결코 폐쇄적으로 자기 안에서 완성될 수 없고, 예술에 대한 판단은 가치기준이 모호해서 실제로 인간관계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한 편, 당대의 성공과 예술의 소통은 조금 별개이긴 하지만, 당대에 완전히 고립되어 작업에 몰두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어디엔가 있을 누군가 관객을 상상하며 작품을 제작했을 것이기에(혹을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작품은 항상 그것을 매개로 하여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성공한 작가에게는 그에 걸맞은 사회적 요구와 더불어 새로운 규모와 형식의 작업을 개발할 외적인 기회가 빈번히 마련될 것이다. 이러한 외적인 동기가 작가에게 항상 좋은 결과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상응하는 내적 동기를 충분히 갖춘 작가에게는 중요한 도약의 발판이 될 수도 있겠다.(세속적 성공의 긍정적인 측면)
예술가의 발언이 사회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사회에 새로운 시각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물이 정체되어 썩지 않고 흐르게 한다는 말이다. 예술의 내용은 사회라는 그릇에 흘러드는 물의 성질 뿐 아니라 사회 자체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 성공의 의미를 새로 다짐하는 것은 기존의 성공의 틀 안에서 경쟁하는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예술가에게는 경쟁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새로운 것을 원한다면 더 멀리 나가서 더 많은 것을 보자. 경쟁의식에서 비롯된 성공보다 예술가에게 더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시각이다. 이것은 나만의 편협한 시각에 갇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가 예술에게서 필요한 것이 새로운 시각이라면 새로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남보다 유리한 패를 쥐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주인 의식을 가지고 내 손에 쥔 카드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매 순간 선택해온 내 삶의 행로의 유일함에서 온다. 치사하게 뒤로 물리거나 속이는 것은 없다. 무조건 앞으로 가는 거다. 그 대신 지금의 위치에서 우리는 항상 다시 최선을 선택한다. 이점이야말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인생이라는 게임의 규칙이 아닐까.







열정에 대하여-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2008

김주현

이 글을 쓰는 동기
열정에 대해 생각한 것은 일 년 전 내 작업의 열정이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질문을 받은 이후부터이다. 인문, 사회, 생물학적 견문이 좁은 필자는 열정에 관하여 학문적인 입장에서 논할 자격이 없으나, 다만 나 자신의 성장과 20여 년 간의 창작활동이라는 경험에서 얻은 열정에 대한 이해와 함께, 작가적 상상력을 덧붙여 열정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정리하였다.

열정은 삶에 대한 환희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게는 삶을 유지하기위한 기본 욕구가 있다. 욕구에는 숨 쉬고 먹고 자는 것과 같이 기초적인 것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욕구가 있다. 이 두 가지를 욕망이라 부를 것인데, 많은 경우에 이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다.
열정은 여분의 욕망이다. 무엇이든 꼭 필요한 만큼만 하는 것은 열정적이라 하지 않는다. 열정적인 사람은 항상 필요하거나 요구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열정은 자발적이다. 오직 자발적인 욕망만이 열정이 될 수 있으며 어느 누구도 열정을 강요할 수 없다.(열정의 샘이라고 표현함)
열정은 긍정적이고 기쁨에 찬 욕망이다. 열정은 그것을 품은 사람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도 모두 기쁘게 한다.
열정은 반드시 외부로 발현되고, (열정의 불꽃이라고 표현함) 이렇게 나타나는 열정의 결과는 다른 사람이 함께 느낌으로써 공유할 수 있다.
이러한 열정의 속성은 바로 예술의 속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모든 열정적인 사람이 예술가인 것은 아니지만, 예술적 소질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나는 예술을 창의적인 시각(방법)으로 새로운 의견(내용)을 제시하는 사회적 소통의 수단(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의 씨앗을 빼앗긴 사람들
인간은 누구나 열정의 씨앗을 마음에 품고 태어난다. 갓 태어 난 아가들은 무엇이든 해보고 싶어 한다. 무엇이든 입으로 가져가고 시력도 완성 안 된 눈으로 뭐든지 응시한다. 무엇이든 그대로 따라하고 조금 지나면 어디든 가려고 한다.
단순한 동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문화와 가식의 옷을 입고 사는 인간들의 대부분은 그러나 곧 열정을 잃어버린다.
어린 아이에게서 열정의 씨앗을 빼앗는 자는 놀랍게도 대부분 그 아이의 부모이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하여 누구든 사회 규범을 익혀야하는데, 이를 우리는 교육이라고 부르고 출생 이후 최초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자식을 키우면서 주변을 관찰한 경험에 의하면 많은 아이들은 세 살 정도가 되면 이미 무수한 금지 사항을 익히면서 스스로의 열정을 잃어버린다. 5세가 되면 적극적으로 다른 아이들의 열정을 저지하는 데에 솔선수범하기도 한다. 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스스로 열정을 생산하지 못한다. (아이의 열정은 강압적인 부모의 자녀에 대한 관심에 반비례한다.)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열등의식과 좌절의 경험이 열정의 씨를 죽이게 되거나,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한 열정은 성장기를 거치면서 심성을 뒤틀리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된다. 열정의 씨앗이 몸 안에 남아있으되 이를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여 밖으로 분출하지 못한 열정은 스스로를 옭죄는 괴로움이 되거나, 그 화살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여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열정의 존재 자체를 잊는다. 그들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삶의 환희인 열정을 잃은 사람들은 삶을 지루한 의무로 채워가다가 삶이 굉장히 지루해지면 천박한 욕망으로 위로한다. 먹이와 소유물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라고 부르는 욕정과 지배의 관계, 그리고 이것들이 짧은 시간 제공하는 말초감각의 자극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동안 인간은 솔직하다. 약간의 열정이 싹을 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가 받은 교육에 충실하게 자신의 열정 섞인 욕망을 억누른다. 그리고 자신이 배운 대로 다시 자기 자식들에게 열정을 없애는 방법을 교육시킨다.
만일 대다수의 열정 잃은 사람들이 반대로 열정에 가득 찬 삶을 산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보았다. 인간 대부분이 끓어 넘치는 열정을 안고 살아가도 지금처럼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 더 즐겁고 자발적이고 행복한 사회가 되었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 사회는 과다의욕을 수용하지 못하여 오히려 위험에 처했을까. 그렇다면 대다수의 인간이 열정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수많은 인간이 집단으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식인가. 이 글을 일는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열정적인 삶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왜 사람들은 열정을 버린 삶을 택한 것일까.

열정의 나무가 자라남
열정의 씨앗은 그것을 품고 있는 인격체의 성장과 더불어 발아하고 성장한다. 열정의 나무를 키우는 양분은 독립심과 자신감이다. 편안한 환경에서 처음부터 긍정적인 자아를 발달시켜 골고루 풍성한 나무로 자라기도 하는 한 편, 어려운 상황의 불편한 성장 조건에서 왜곡의 과정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성장의 준비를 마치고 자라나는 나무도 있다. 소로우가 묘사한 야생사과*와 같은 나무는 갖은 고초 끝에 늦은 성장을 시작하지만 일단 자라기 시작하면 하늘은 찌를 듯이 높이 솟아오른다. 이렇듯 독립심과 자신감조차 외부에서 조성된 것 보다 스스로 체득한 경우에 더 비옥한 양분이 되는 것이다. (*H.D.Thoreau,시민의 불복종 중 야생사과, 이레 : p155~ 사과나무는 해마다 이렇게 갉아 먹히지만 절망에 빠지지는 않는다. 가지 하나가 갉아 먹힐 때마다 짧은 가지 두 개를 새로이 내밀면서 사과나무는 땅 위로 나지막하게 퍼진다. 주로 땅이 움푹 들어간 곳이나 바위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관목과도 같이 땅땅하게 옆으로 퍼지는데, 나무라기보다는 차라리 작은 피라미드형의 촘촘한 가지 투성이의 밀집체이다. 중략...소들은 이런 식으로 20년이나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사과나무 관목을 계속 뜯어먹는다. 이 때문에 나무들은 위로는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퍼질 수밖에 없다. 마침내 나무는 상당히 넓게 퍼진 모습이 되어 스스로를 보호하는 울타리를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 때 사과나무의 적들이 미치지 못하는 나무 안쪽으로부터 어린 가지 하나가 환호작약하면서 위를 향해 뻗쳐오른다. 그 가지는 자신이 부여받은 높은 소명을 잊지 않았던 것이며 이제 당당하게 자기 고유의 열매를 맺는다.)

차오르는 열정의 샘
열정의 나무가 자라는 곳에는 반드시 열정의 샘이 있다. 나무가 크게 자랐더라도 불꽃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샘의 물이 필요하다. 열정의 나무와 달리 열정의 샘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없다. 열정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그저 샘에 물이 고이기를 기다려야한다. 열정의 샘은 뭔가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가끔 무엇인가를 꼭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욕망이 생겨 자나 깨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열정의 샘이 가득 찬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열정의 씨앗과 마찬가지로 열정의 샘도 처음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열정의 샘은 때가 되면 스스로 물이 고인다. 어려서는 열정의 샘의 욕망을 단순한 몸의 욕구와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몸의 욕구와 동일시하여 그저 먹고 소유하고 성적 쾌락을 추구하거나, 혹은 반대로 욕구를 부정하는 것으로써 열정의 샘을 고갈시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몸의 욕구를 아무리 채워도 내적인 욕망이 전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경험을 통해 인간에게 단순한 몸의 욕구 이외에 다른 욕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마음 깊숙이 감춰져있는 열정의 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외향적인 사람, 너무 바쁜 사람, 무심한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볼 일이 없다. 샘에 물이 가득 차더라도 그 물을 퍼내지 않으면 샘은 곧 썩어 버린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하고 싶은 예술가라면 작품을 하고 싶은 욕망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보라고 하고 싶다. 만일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경우 무엇을 해봐야 좋은 작품이 나올 리가 없으니까. 그러나 열정의 샘과 나무를 잘 간직하고 있었다면 언젠가 기다림은 한계에 다다르게 된다. 샘에 물이 넘쳐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얼굴을 가득 채워 눈, 코, 입 귓구멍이 퉁퉁 붓다가 터질 정도의 압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려야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니까. 그것이 터지기 직전에 퍼내어 그 물을 열정의 나무에 부으면 아름다운 열정의 불꽃이 피어난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이렇게 될 때까지 기다리지를 못한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예술가와 작품은 많은데 좋은 작품이 별로 없는 것이다. 성공하겠다든지, 돈을 벌겠다든지, 자기 과시욕에 의해 만들어지는 작품은 내적 필요성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미 성공한 작가들일 수록 기다림이 어려운데, 수많은 외적 요구들 때문에 순수한 내적인 필요성으로 작품을 만들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열정의 샘을 함부로 퍼내면 금세 고갈되고 마는데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샘을 박박 긁어내는 안타까운 경우를 자주 본다.
열정의 샘의 존재와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평생 단 한 점의 작품을 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헛되지 않은가 반문하지 말라. 기다리는 사람은 그냥 노는 것이 아니다. 언제든 샘물을 길을 그릇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쁠 것이다. 그렇게 오래 기다려야한다면 그 소중한 물을 긷기 위하여 소중한 그릇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좋은 작가라면 이런 저런 그릇을 만들어보고 물을 잘 긷고 붓는 방법을 연구할 것인데 이것이 예술의 새로운 형식이 되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물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그릇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노련한 작가는 맑은 물이 찰 수 있도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물이 차오르는 때를 짐작하기도 한다.

타오르는 열정의 불꽃
열정의 샘에서 길어 온 물을 먹으면 열정의 나무는 불꽃을 일으킨다. 열정이 불꽃으로 타오르게 되면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 열심히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일에 열중한 사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사람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몸을 벗어나서 타오르는 불꽃은 힘이다. 엄청난 열정으로 가득 찬 사람이 내뿜는 불꽃의 힘은 아주 커서 세계를 전부 삼킬 수도 있고 이런 불은 그 사람이 사라진 후에도 수 백 년 동안 계속되기도 한다. 모든 열정이 다 예술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 행위와 작품은 모두 열정의 불꽃이 체화된 것이다. 그 중 음악이나 미술, 문학작품은 보존과 유통 방식이 잘 개발되어있어서 심지어 쉽게 살 수도 있다. 특히 음악은 열정의 캡슐약이다. 한 곡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열정의 불길에 휩싸여서 온 몸의 혈관이 터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엄청난 경험을 하는 데에 겨우 얼마의 돈을 지불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몹시 지루하고 긴 노동에 지쳐서 더 이상 숨쉬기도 힘든 적이 많은데, 이럴 때 열정이 넘치는 노래를 한 곡 들으면 별안간 무서운 힘이 솟아나는 것이다. 힘들다고 느낀 것이 엄살이었든지 아니면 한 곡의 노래가 엄청난 에너지 축약 덩어리이든지 둘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막상 이런 노래를 만드는 뮤지션들은 어디에서 마땅히 에너지를 충전할 곳이 없는가보다. 큰 열정의 불꽃을 생산해 낸 뮤지션이 마약에 중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으면 다른 사람에게 열정의 약을 나눠주느라고 정작 자신은 해로운 약에 중독되는가 하여 마음이 아프다. 음악과 공연예술이 순간적으로 발산되는 큰 불꽃이라면 문학과 미술은 그에 비해 오래 지속되는 은은한 불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예술에서 하나의 불꽃을 일으키고 키우는 데에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_열정의 불꽃을 가지고 노는 사람들

열정을 나누어 가짐

열정은 머릿속에서 반짝이는 착상(아이디어)과는 다른 것이다. 착상은 외부의 자극과 나의 경험이 마찰을 일으키며 발생하는 수많은 정전기와 같다. 예술가는 그것들을 재빨리 붙잡아서 작품에 포함시킨다. 작품을 재미있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은 양념에 불과하다. 열정은 마음 속 훨씬 깊은 곳에서 생겨난다. 열정은 예술이라는 식사에 제공되는 음식 그 자체이다. 어떤 식당에서 누구와 함께 어떤 식기에 담긴 음식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분야와 시대, 사조의 예술을 골라 감상하는 것과 같다. 요점은 우리가 예술을 통해서 열정을 섭취한다는 것이다.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는 데에 차이가 있듯이 열정이 담긴 작품을 감상하는 능력은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 흔히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특별한 학습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지만, 나는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자연의 정취를 느끼고 사람들 간의 감정을 감지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감성을 읽는 특별한 기관이 머리에 보다는 가슴 속 어디엔가 있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다. 그것을 도대체 뭐라 불러야 좋을 지 알 수가 없다. 그 기관은 아주 연하고 부드러운 조직이고 마찬가지로 연약하고 얇은 거름망 안에 들어있다. 조직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르게 타고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이 변한다. 열정의 씨앗이 죽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없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보다는 단단하게 굳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만지면서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감성을 받아들이는 이 기관은 거름망을 통과해서 여과된 감성의 정보를 마음으로 읽는다. 거칠고 굵은 표현들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감성의 입자는 원래 미세한 것이어서 섬세한 거름망을 가진 사람들은 훨씬 더 세부적인 감성의 알갱이를 판독할 수 있는데, 세심하다는 말이 바로 이와 같은 뜻이다.

_감성의 기관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상처받기 쉬운 가는 망에 들어있는 감성의 기관

느낌의 영역에서는 즐거움과 고통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세심한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상처를 많이 받고 작은 자극에도 연약한 거름망이 찔리거나 찢어지는 일이 잦은데 이것은 실제 살갗이 찢어져 맨살이 드러나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수반한다. 찢어진 부분을 복구하여도 다른 자극들이 쉴 새 없이 들어와 박혀 계속 다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는 악의적이고 거친 표현들이 많아서 어떤 자극은 너무 깊이 박히고, 간혹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를 지니고 살아야 하기도 하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웬만한 자극들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감성의 망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감성의 기관이 무엇인지조차 알 지 못한다. 또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만큼만 느끼기 때문에 감성으로 인해 고통 받을 일이 별로 없다. 어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연약한 거름망을 두꺼운 껍질로 무장해버리기도 한다. 어려서 감수성이 뛰어나던 사람이 무심한 어른으로 변하는 것이 이련 경우인 것이다.
예술이 내뿜는 열정의 불꽃을 공유하려면 그것을 감지하는 감성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예민한 감성을 타고 난 사람들이다. 혹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예민한 감성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이 예민한 감성이 주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비록 예술은 열정의 불꽃으로 살아있으나 자신의 삶을 파멸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언제까지고 연하고 말랑말랑한 감성을 유지하여 아름다운 열정과 함께 세상에 산재한 고통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두껍고 단단한 벽으로 무장하여 나를 외부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것인가. 이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계속 주어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비록 스스로 열정의 불을 피울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단단해진 감성의 벽에 하나의 틈을 내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마련한 열정의 식사에 동참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하나의 열정을 맛보기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함께 따라 들어오는 백 개의 고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열정의 참맛을 아는 사람에게는 고통의 맛이 두렵지 않다. 용감하게 열정의 식사에 도전하다보면 어느덧 아름다움과 고통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맛으로 인식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맛인 것이다.

요약 : 사람은 누구나 열정적인 기질을 타고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억압된 사회화 과정에서 자신의 열정을 잃는다. 성장기에 열정의 씨앗을 잘 간직한 사람은 자신의 열정을 창조적인 일에 사용할 수 있다. 비록 스스로 열정의 불꽃을 피울 힘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만든 열정의 불꽃을 공유함으로써 열정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