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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다리
2007. 2. 7

김주현
 

<생명의 다리>는 <생명의 그물>이라는 주제의 작업을 응용한, 사람과 동물을 위한 보행 전용 다리이다.
<생명의 그물 The Web of Life>이란 원래 과학철학자인 프리쵸프 카프라의 책 제목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과 같이, 각각의 분자와 기관과 개체, 종과 환경을 포함하는 여러 요소들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며 관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특권화하면서 자연을 파괴하고 있음을 경고하는 이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 나의 작품 제목을 <생명의 그물>이라 붙이고 있다.

<생명의 그물>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막대들을 서로 겹치지 않게 배열해 쌓아서 구조물을 만드는 공법이다. 필요에 따라 넓게 펼칠 수도 있고, 높게 쌓을 수도 있는 이 방식은 여러 개의 점에 하중을 나누어 실으면서 여러 각도에서 뻗어 나온 선에 의해 견고하게 점을 고정시킬 수 있는 이점이 있고, 보는 각도에 따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를 제공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이 다리의 특징이다.
생명의 다리를 구성하는 수 십 개의 기둥은 수 만개의 막대로 이루어져있는데, 구상 단계에서는 그것들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될 지 아무도 모른다.
발생 초기의 세포에서 각각의 단백질 분자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형태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첫 번째 다리가 두 번째 다리에 연결되고,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두 번째 다리에 연결되기 위해서 세 번째 다리가 가지를 뻗고, 무거워지는 상판을 받치기 위해 네 번째 다리가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계획 없이 모든 것을 임의에 맡기는 것은 아니다.
세포 속의 분자들에게 개체의 삶이라는 목적이 있듯이 막대들에게도 임무가 있다.
그들은 조합하여 강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야한다.
목적을 가진 임의성은 스스로 법칙을 만들어낸다.
막대들는 교각과 상판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서, 길이만 다른 정사각형 파이프이고, 전체 구조의 안정을 위해서 항상 수평을 유지해야한다.
그런데 자신의 주위에 같은 레벨을 유지하면서 막대를 연결시킬 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도 소외되는 점 없이 같은 층의 모든 점이 다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층에서 막대를 올리지 못하면 그 점은 죽고, 그 부분의 성장은 거기에서 멈출 것이다.
계속 같은 구간만 반복해서 형태가 단조로워지지 않도록 하도록 어떤 점은 죽이고 새로운 점들을 만들어 조화롭게 연결하고, 필요없어진 점을 죽이는 일은 생명 게임이다.
이 게임은 평면상의 도면 층 채우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체험해 볼 수 있다. 즉, 하나의 점을 중심을 뻗어나간 막대들이 서로 겹치거나 빠지지 않도록 알맞은 층의 수를 부여하는 것이다.
수학적 놀이와 같은 이 작업을 하면서 나는 상호 연관성, 생성과 소멸, 관계, 무게 중심이나형태와 같이, 하나의 막대 차원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의 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체에 관해 많이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의 막대가 되어본다.
내가 저 막대 중의 한 점에 위치해있다면, 나는 어디로 뻗어갈 것인가?
나는 어느 점에서, 한 막대 위에 태어났다. 이 막대의 양쪽 끝 점은 나의 부모이다.
나는 나와 같은 높이에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점을 찾아 거기에 새로운 관계인 막대를 연결하고 내 위에 다른 막대가 놓일 수 있도록 안정된 점을 제공해야 한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할 것은 내 밑의 점과 똑같은 지점에 막대를 두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내 아래 막대들과 다른, 새로운 지점을 찾아야한다.
풍부한 다양성은 곧 생명력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적당한 점을 다른 점들의 사정 때문에 빼앗길 수도 있다.
그래서 시시하게 내 아래아래 층과 같은 곳에 막대를 연결해야 할 때도 있고, 한 점의 마지막 층으로서 어쩔 수 없이 죽어야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운이 좋으면 남들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에 저만큼 나아가 새로운 점을 만들 수도 있다. 그렇게 새로운 점을 차지하면 나는 전체 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떤 운명이든,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전체 계의 원리에 순응한다는 것. 그리고 아직은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았으니 어쨌든 희망을 가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공상을 하며 작업을 하다보면 막대가 살아 있는 세포로서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막대가 하나의 개체로서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죽는 것 같기도 하고, 막대 하나하나가 한 생물의 종으로서 먹이사슬의 그물망 속에서 지구상에 긴 세월 진화의 구조를 만드는 것도 같다.

이 다리를 보고 걷는 사람들이 생명의 이치와 소중함을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다.
자연은 멋 부리지 않고, 낭비하지 않고, 계획하지 않는다.
자연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꼭 필요한 것만 하며,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애쓴다. 우리가 잊고 사는 것,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생명의 다리>를 통해서 떠올릴 수는 없을까?

비버가 오랜 시간 공들여 댐을 짓듯이, 흰개미가 서로 협력해서 거대하고 놀라운 건축물을 만들어내듯이, 수 만개의 막대가 모여 한강의 남과 북을 연결하는 생태 다리를 만드는 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협력하여 수행하게 될 것이다. 건설에 참여하고, 이를 지켜보고, 완성된 다리를 건너고, 다리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그 긴 과정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은 한강을 아름답게 장식하려는 목적이나, 편리하게 강을 건너려는 이유나, 경제성을 따지는 계산보다 우선하여 한강에 <생명의 다리>>를 구상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유기적인 구조와 형태의 다리 위에서, 자동차로 가는 것보다 불편하게 오랜 시간을 소요해서 이 다리를 건너면서, 나는 사람들이 <생명의 그물>에 관해 생각하기를 바란다.









진화
2007

김주현

다윈이 진화설을 주장한 이후로 많은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발생과 진화의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 인간은 박테리아와 단세포, 다세포 생물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고, 세포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심지어 유전 정보가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지도 알아냈다. 모든 척추동물이 발생 초기 배에서 비슷한 형상을 띠는 것을 보고 그것들을 한 가지에 분류할 줄 알았고, 가장 늦게 진화한 포유동물 중에서도 인간, 우리를 가장 잘 진화한 생명체라고 믿었다.
대부분의 우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 뿐이다. 인간을 진화의 사다리의 정점에 놓는 이러한 견해는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함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잔혹한 착취와 살생뿐 아니라 인종차별에 의한 민족 말살을 정당화시켜주었다.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진화에는 어떠한 목적이나 방향성도 미리 마련되어있지 않으며, 현재 살아남은 종은 우위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성공적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시대가 포유류의 전성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절지동물, 또는 박테리아의 전성기라는 생물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인간 종은 가장 고귀함으로 세상을 마음대로 요리해도 된다는 믿음은 너무도 달콤하여, 그 근거가 되는 과학적 가설들이 허구임이 증명된 지 오래된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수 백 년 묵은 편견에 매달려 있다.
바로 이 편견이 남아메리카의 토착인들을 몰살시켰고, 아프리카의 흑인을 노예로 잡아다가 팔았으며, 지금도 숱한 전쟁의 떳떳한 근거가 되고 있으며, 몇 사람의 주머니를 채울 몇 푼의 돈을 위해 온 땅과 바다를 들쑤셔서 생명의 씨를 말리고, 단지 맛이나 멋이나 재미로 동물들을 고통스럽게 죽게 하는 행위를 용인한다.
잘못된 진화론에 대한 믿음이 야기하는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진화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만 하며 인간 종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인간은 과연 다른 종을 지배할 뛰어난 종인가? 두뇌가 발달했다는 것은 곧 생명의 가치가 높다는 것인가? 머리가 좋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인가? 인간은 그래서 다른 생물보다 더 잘 살고 있는가? 우리는 행복한가?
만약에 진화의 우열에 상관없이 모든 종이 다 소중한 생명을 지닌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자연에 대한 온갖 파괴와 잔학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만행이다. 불과 50년 전에만 해도 인종차별이 합법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오늘날 비록 심정적으로는 여전할 지도 모르지만, 어떤 이유에서이건 다른 인간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은 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끄러운 차별에 통탄한다.) 다른 생명에 대한 인간의 만행이 만행으로 인식되는 시대가 오면, 그 때 오늘의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울 것인가.
쥐를 잡기 위해서 쥐약을 놓으면 쥐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삵, 고양이, 족제비와 같은 쥐의 천적을 모두 죽여서 오히려 쥐의 개체수가 늘어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인과관계를 빨리 깨달을 수는 없을까? 인간이 환경을 보호하려고 애쓰되, 그것이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해서가 아니고 환경 그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서인 그런 때가 올 것인가? 구멍 난 지구를 또 다른 과학 기술로 메꾸려 하지 말고, 인식을 조금만 바꾸어서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수정할 수는 없을까? 인간이 다른 종의 생명과 권리를 존중하여 자신의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파괴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시대가 올 수 있을까?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공정한 가치관을 가질 날이 있을까? 인간이 가치관을 바꾸고 새로운 태도로 그들을 대할 때까지 기다려 줄 생명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 것인가?
진화의 시간으로 세상을 보라.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 것인지가 자명해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내 삶을 이어갈 자식이 있다는 것은 희망 찬 일이다. 오늘 굶주리지 않았고 얼지 않았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거기에 살아있는 자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면, 자신의 삶으로 인해 다른 삶이 희생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이제는 함께 살도록 노력해야 할 때이다.





김주현 포럼 발표
2007. 11. 24


김주현
 
생명의 다리- 두 번째 전시의 취지


비교적 최근의 과거에만 하더라도 문인, 화가, 음악가, 무용가 등 예술인 뿐 아니라, 과학자와 사상가들이 함께 자신들의 작품과 연구 내용을 교감함으로써 시대정신을 공유하고 진보적인 사유에 동참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에 뿌리내린 근래에는 모든 학문의 분야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파편화, 상품화 되어가고 있다. 학문 간의 소통이 단절된 결과로 우리는 자신의 연구에 관심을 보이는 독자들을 잃었으며 되돌아오는 메아리 없는 연구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미술 작품은 갤러리, 미술관 등 한정된 공간에서 극히 제한적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다.
미술에서 제한된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공공미술 개념을 도입하고 있지만, 현재 건축물 앞에 자리 잡은 획일적인 형식의 거대한 구조물들은 대부분 대중에게 미술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권력과 자본의 상징물인 경우가 많다.
또는 미술 작품이 고급 사치품으로서 일부 제한된 투자가들에게 사고 팔리는 현재의 미술시장은 미술을 일반 대중들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게 하는 한 편, 미술품을 한낱 물건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예술의 가치는 희귀한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사유의 도구이며 소통의 매개체로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현재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문화 기반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스스로 문화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소통의 망을 건설할 필요성과 의무를 느낀다.

과학 철학자인 프리초프 카프라는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The Turning Point / Fritjof Capra)이라는 책에서 과거 수 백 년 간 인류의 기술문명을 발전시킨 기계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뉴턴의 과학이념이 이제는 전일적이며 생태주의적인 사고로 전환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세계를 단순화되고 분절된 모형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 이해하고, 지금까지 무시해왔던 작은 부분들의 역할과 상호의존성을 존중하는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근대 과학 사상에 의해서 야기된 많은 문제들을 이제라도 바로 잡기 위한 매우 중대한 시작이다.
미술과 과학이 분절되고, 개인이 전체에서 소외되고, 인간 문명에 의해 자연 환경이 파괴되는 현상의 근원에는 이제까지 인류 문명과 함께 죽 발전해 온 인간 중심의 사상이 깊이 자리 잡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부와 혈통으로 세습되는 신분에 대한, 성에 대한, 인종에 대한, 종에 대한 차별이 계속되고, 눈 앞에 보이는 파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환경의 파괴가 계속되는 배후에 근대적 사고 방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런데 정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심지어 자신의 육체까지-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 보는 근대 과학의 환원주의적 사상이 이처럼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 두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필요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시대의 사상을 근대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와 전일적 사고로 전환하려면 먼저 사람들 자신이 그 필요성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근대적 사고와 자본주의의 틀 안에 안이하게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고 전환의 절박한 필요성을 알릴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바로 이 임무를 담당해야 할 사람들이 예술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술가란 적당히 겉멋이나 부리는 것으로 세상에서 화려한 단물을 빨아먹는 존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의에 의하면,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자기만의 고유한 기법으로 그 꿈을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상상은 항상 건설적이지 않고, 간혹 파괴적이거나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시도가 진정한 필요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을 위해 사회나 예술가 개인이 감수해야 하는 희생인 것이다. 새로운 진화를 위한 변이 형질이 항상 생존에 유리하지는 않은 것과 같이.
감히 나의 작업을 이와 관련하여 설명하자면, 1996년 발표된 경첩연결 작업과 종이 쌓기 작업 이후 전체를 이루는 부분 간의 상호연관성을 탐구하는 것은 내 작업의 일관된 주제이다. 한 번에 큰 힘을 낼 수 없는 나의 신체 특성을 고려하여 작품을 조립 가능한 작은 부분들로 나누다 보니 부분들의 조합 방식과 반복되는 행위가 만드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차이에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2004년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막대 쌓기 작업은 앞서 언급한 프리초프 카프라의 다른 책 제목인 <생명의 그물>을 인용하여 <생명의 그물>공법이라 명명하였는데 이는 수평을 유지하며 여러 개의 점을 연결하는 선들이 구축하는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다변적인 형태와 구조에 관한 탐구이다. 이 작업을 통해서 생태계를 비롯하여 복잡성을 드러내는 관계망을 조형물로 표현하기를 시도하였다.

막대를 만들어 쌓으면서 나는 막대들이 우리들 개인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한다. 막대들을 의인화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길이는 다르지만 같은 단위로 되어있어서 획일화된 문화가 배출하는 개인의 모습을 연상하기 때문이고, 분리되어서는 길이만 다를 뿐 모두 같아 보이지만, 하나의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막대들이 각기 고유한 위치에 배치되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하나 하나가 소중한 개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저기 맨 밑에 깔린 막대를 보자. 지금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무게에 짓눌린 저 막대가 한 부족의 시조이다. 그 막대를 기준으로 위로 여러 층의 막대가 쌓이고 쌓여서 서로의 무게로 안정된 구조를 구축해나간다. 그런가 하면 중간에 삐죽 나온 저 자식 막대를 보면 아래층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영역을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누군가는 언젠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안전한 영역에서 같은 구간만을 계속 오간다면 진화가 없는 단순반복만 되풀이할 것이다. 새롭게 뻗은 막대의 방향은 그러나 다시 그 다음 층에서 동조하는 막대의 길이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새 점의 위치가 정해지면 그 위로 다시 여러 대의 막대가 삶을 이어갈 것이다. 새로운 점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너도 나도 모두 새 점만 차지하려고 멀리 뻗어나가면 형태는 흐트러지고 무게 중심을 잃어 전체가 쓰러지고 말 것이다. 막대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야 할 뿐 아니라 전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보면 완성된 작품은 여러 개의 막대가 서로 협동하여 이루는 사회와 역사의 구조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자, 이제 막대들이 인간이 아니라, 각각의 생물 종을 은유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작품 전체의 그물망이 생태계의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형상화한다고 상상해보자. 이번에는 쌓기 작업을 하지 말고 허물기 작업을 해보자. 사람들은 한 편으로는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서 생태학을 연구하지만, 반대로 개발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생태계 파괴의 허용 한계선을 규정짓고자 하기도 한다. 생태계에서 대체종이 충분히 있다면 굳이 어느 한 종의 멸종을 막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어떤 종이 멸종해도 좋은 종일까? 만약 나에게 전기 톱을 주고 저기 나무 작품 중 없어도 될 것 같은 막대들을 차례로 잘라내어 보라고 한다면, 얼마나 잘라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늘 그런 것처럼 미적 기준 따위는 무시하고 붕괴 여부만 고려하여 막대들을 제거해보라. 쐐기역할을 하는 중요한 몇 개의 막대가 살아있는 한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물망 구조는 버틸 것이다.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 쓰러져가는 그 구조를 보고 괜찮다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만신창이가 된 그물망 구조를 상상하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생태 환경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만 더 잘 살기 위해서 이웃을 해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종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생태계의 그물망에서 인간 역시 단 하나의 막대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막대를 없애는 일은 곧 자신을 파멸시키는 일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유치한 형식으로나마 작품을 통하여 표현하고 싶었다.

이제 작품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는 예술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나는 나의 작업을 주어진 미술계의 범위에서 벗어나 건축의 영역으로 확장하려 한다.
지금 우리의 도시는 오직 경제적 효율만을 위하여 지나치게 밀집되어 있으며 단순한 직선만이 반복되어 거주자와 특히 보행자들에게 불편하고, 도시 경관에도 크게 해를 끼치고 있다. 우리 나라와 같이 빠른 시간에 급성장한 도시는 온통 인공물과 자동차로 가득 차 있고 공공의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시민을 위축되게 한다. 높은 빌딩의 담벼락과 거대한 차로 사이에 놓인 위험한 보도를 매연을 잔뜩 마시며 걷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빨리 돈 벌어서 좋은 집과 차를 사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집을 짓고 새 차를 산다면 도시의 황폐화는 더욱 심화될 뿐이다. 그렇다고 하여 도시를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어떻게 하면 문명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게는 소원이 있는데, 눈을 들어 밖을 바라봤을 때, 우리 도시에 더 이상 인간과 인간을 위한 건물만 가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도로에는 지금보다 열 배는 풍성한 가로수들 사이에 보행자 편의를 위해 좀 더 안전하고 합리적으로 연결된 보도가 마련되기를 바라고, 건물의 사면과 옥상은 초록으로 뒤덮여서 도시 전체가 초록으로 보일 뿐 아니라 그 안에 많은 벌레들과 새들과 동물들이 깃들어 살았으면 좋겠다. 건물 하나를 지으려면 그 만큼의 초록 공간을 확보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법안이 생기고 누구나 초록으로 멋지게 치장된 건물에서 사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런 도시를 꿈꾼다. 그래서 녹색 기운을 찾아 자연을 새로이 개발하지 않고서도 이미 훼손된 도시 문명 안에 자연이 공존할 수 있도록 힘쓰는 미래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바램으로 나의 <생명의 그물> 구조를 응용한 건축물 안을 들고 건축가들을 찾았다.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건축 문명을 개척할 동조자를 찾기 위해서 이다.
<생명의 그물> 공법으로 지은 집은 바닥을 콘크리트로 뒤덮지 않고서도 안전한 구조 기둥을 세울 수 있다. 그래서 집을 지으면서도 땅을 숨쉬게 할 수 있으며 토양을 터전으로 사는 생물들을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다. 또한 지금과 같이 유리와 콘크리트 절벽으로 된 건물을 개조하여 사면에 흙을 채워 넣고 나무를 심을 공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다양하고 유기적인 형태를 통해 획일화된 경관에서 탈피할 수 있고, 서로서로 연계되는 구조의 확장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공법은 인간에게 비싼 대가와 약간의 희생을 요구한다. 이런 방식으로 건물을 짓는다면 지금보다 많은 건축비를 지불하고도 인간이 차지하는 공간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건축가는 남의 집을 지어주는 사람이므로 먼저 집 주인에게 그럴 의향이 있는지 먼저 물어야겠다. 여러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반을 자연 혹은 다른 생물에게 내어줄 생각이 있는가? 내 집의 담을 허물고 내 땅의 반을 이웃과 함께 공유할 준비가 되었는가? 혹은 보행로와 녹지 확장으로 차도가 줄어서 지금 자가용으로 한 시간 걸려 가는 곳에 가기 위해 두 시간을 소요해야 한다고 해도 차도를 줄이는 데에 찬성할 수 있을까? 도심의 모든 부분에서 쾌적하고 편리한 보행과 대중교통이 보장된다면 굳이 자가용을 타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한 개인과 그 가족의 공간은 줄어들 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넓어진 녹지와 자연이 다시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비싼 차와 큰 집을 마련하느라 더 많이 하던 일을 줄이고 그 만큼의 여유를 나무 그늘이 가득한 작은 산책로에서 가족과 함께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꿈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일까?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침팬지 연구에 몰두하다가 전 지구 상에서 사라져가는 침팬지 서식지 파괴에 대한 실태를 깨닫고 세계 각국을 누비며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강연하는 제인 구달님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은 그 분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사람들 각자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지 침팬지를 지키자는 자신의 관심사에 국한되지 않고, 지구의 생태계를 비롯한 사회, 국가간 차별과 폭력 문제 앞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개인에게 바로 우리의 식생활과 소비 행위와 개개인의 가치관이 지구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하고,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지침을 줌으로써 우리에게 작은 희망을 품게 한다. 엄격한 채식주의자가 되지는 못하여도 고기를 덜 먹고, 고기를 먹더라도 그 동물이 어떻게 사육되고 어떻게 도살되었는지에 관심을 가지며, 값이 비싸서 반의 반만 사더라도 항생제와 성장촉진제가 뒤범벅이 된 사료를 먹지 않고 쾌적한 환경에서 사육된 고기를 소비하는 것은 곧 건강한 축산환경을 조성하도록 돕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소비자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라는 것, 싸다고 해서 무조건 살 것이 아니라, 이것이 꼭 필요한 것인지, 어떻게 버려질 것인지, 생산과 유통과정에서 기업의 비윤리적인 착취가 있지 않은지 고려하는 일은 지구의 자원을 아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되는 약자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인 구달님의 책과 강연은 이렇듯 환경과 인권 운동을 우리들의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달리 말하면 지구 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력과 착취가 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제인 구달님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들은 소비자로서, 유권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 이 세상을 충분히 바꿀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만큼 꿈꾸고, 소리 내어 말하고, 실천하라.

나의 작품은 지금 이 상태로 완성되어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 민족과 민족 그리고 개인과 개인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미래 사회의 모형이다. 그 실현을 위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막대인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필요하다. 이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닫혀진 미술계를 벗어나고자 미술과 무관한 공간에 작품을 전시하고 여러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모아 포럼을 개최하였다. 한강에 정말로 이 엄청난 다리가 세워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사업의 과정을 계기로 우리의 환경을 둘러보고,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는 불공평한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나와 내 주변을 바라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깨달음이 유행병처럼 주변에 번져나가 세상이 초록으로 물들기를 희망해 본다. 이 세상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줄일 수 있기를 바래본다.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기는 어렵다. 먹고 살기가 바쁜데, 무슨 환경이며 생태 보존이냐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이라고 믿었던 것이 남이 아니라 나의 일부라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근대 사상이 가르친 대로 ‘나’의 범위를 최소 환원주의에서 보지 말고, 내 자식이 당연히 나의 일부이듯이 모든 자식들이 다 나의 일부일진대, 그렇다면 전 인류가 나이고, 모든 동물과 식물이 나이고, 바로 내가 살아 숨쉬는 지구 전체라는 생각을 해 볼 수는 없을까?
세상에 나 하나 뿐인 줄 알았었는데, 어렵게 불을 켜고 보니, 사방에 어렴풋이 이미 많은 불빛들이 보인다. 그 불빛들을 모을 수 있으면 수 십 만 마리의 반딧불이가 큰 나무에 모여 앉아서 동시에 불을 켜고 끄듯이, 언젠가 인류가 모두 힘을 합쳐 이 일에 동참할 것이다.
의미 있는 일의 선두가 되어 열정을 바칠 사람들을 초대한다.
2007년 11월 27일 전시를 마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