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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형 조작
2005

김주현
 
미술 작품은 작가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자신의 내부를 고찰하는 내용이나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각자 적합한 방식으로 이용한다. 작품이 전시되고, 작가에게 감상자가 필요한 이유는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하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는 감상자가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사유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길이 훤히 보이는 탄탄대로이거나, 우여곡절 끝에야 겨우 찾을 법한 골목길이거나 간에, 마치 언어가 그렇듯이, 작품의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논리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또 하나의 개인에 불과한 작가의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사항들만을 가지고서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은 그렇다면 나는 나의 작품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소통하고 있는가? 전시를 하면서 내가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작품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 작품이 어렵다는 평의 감추어진 진의인 작품이 안 좋다 라는 뜻으로 말했을 법한 사람을 제외하고, 진심으로 내 작업에 관심을 보이는 몇몇 감상자들의 이런 반응을 보면서 나 스스로가 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어려움에 관해서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확실히 내 작품은 쉽게 작가의 의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면서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 모르고 당황해 하는 듯하다. 나에게는 참으로 명쾌한 작업 내용들에 다른 사람들은 접근도 못하는 일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작품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 실패하고 있는가? 내 작업이 지니는 소통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내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쉽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결과물로써 제시된 작품에 작가의 의도와 사고를 이해하도록 제공하는 단서가 적다는 데에 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믿는 종교에서도 신이 일일이 모든 사물을 다 만들었을 것이라거나 세상의 모든 일에 다 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은 자연이라는 이름의 모든 현상과 사물에 내재하는 법칙을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법칙들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더 심오한 법칙을. 가설에 불과하다지만 우주의 빅뱅이나 최초의 생명의 발생과 진화의 매커니즘이 발견되고 알려진 현대에는 만일 신이 있다면 그 많은 동식물의 형상을 다 흙으로 빚었다는 것 보다는 어떤 고도로 정교한 프로그램의 시작 버튼을 눌렀을 것이라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그만큼 신의 행적이나 존재를 일상 생활이나 자연에서 직접 찾기는 힘들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한참 수준은 낮지만 다시 나의 창작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작품을 만들면서 결과물이 나타내는 형태나 이미지, 스토리를 구상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작품이 거의 완성되는 순간까지도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거나 아니면 아예 무의미를 대변하는 정형면체로 대치된다. 원 또는 정사각형 등의 형태는 어떤 특정한 미술사조와의 연관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기보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기 위한 차선일 뿐이다.
내 작품들은 완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고정되는 경우가 드물다. 쌓아 올린 종이와 연결된 경첩들은 언제라도 부주의한 관람자에 의해 변형될 수 있고, 작가인 나조차도 다음 번 설치 때는 지금과 똑같은 형태로 만들 수가 없다. 작품이 언제든 흐트러지고 변하게 한다는 것은 결국 결과물로서의 형태를 매우 무시하는 태도이다. 맘에 드는 완성품이 나왔다고 해서 어떤 수단으로 그것을 고정시킬 생각은 없다. 왠지 그것은 작품을 죽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품에 사용되는 재료의 취약성을 보면 그러한 태도는 더욱 두드러진다.
깨지기 쉬우면서도 보잘것없는 석고, 보존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종이, 광택이나 영구성에서 단연 뒤떨어지는 함석판으로 된 경첩. 바로 그런 재료의 예민함과 모자란 물성이 내 작품에 섬세한 감성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내 작품의 재료들은 하나같이 쉽게 변화할 성질을 갖고 있다. 작품을 영구히 보관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결과물로서의 작품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작품 자체가 아닌 다른 점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 작업에 소요되는 긴 시간과 많은 노동의 양을 두고 수행의 과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몇 번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노동이 작업에 미치는 폐해의 위험성을 경고할 정도로 노동의 흔적이 드러나는 작품을 싫어한다. 어차피 누구에게나 삶을 살아내는 것은 고행의 과정인데 작업에서까지 따로 그 일을 할 생각은 더욱이 없다. 내가 작업에 매달려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단지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작품의 외형 중에서도 가장 겉껍질인 기하학적 단순성만 보고 나를 미니멀 작가라 분류하는 것과 더불어, 내 작업을 재료의 물성을 드러내었다거나 수행과 노동의 흔적으로 읽는 것도 나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해석이다.

내가 나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러한 형태를 만들게 하고 그런 노동을 하게 하는 법칙들이다. 나는 조각의 재료 또는 사물들이 관계하는 법칙들을 만들어내고 그 법칙을 실행한다. 나 자신은 내가 스스로 고안해낸 법칙을 실행하는 충실한 종이고, 이렇게 완성된 작품은 이 법칙의 ‘조각적 증명’이다. (혹은 ‘과정의 물체화’이다.)
법칙이 없이는 나의 어떤 작업도 상상할 수가 없다.
대부분 법칙은 매우 간단하다. 예를 들면? 절단면을 잘 맞춰서 종이를 쌓아올리되 처음에는 오른쪽과 왼쪽에서 오는 종이의 겹치는 부분을 0으로 시작하고 (두 장을 펼친 상태) 조금씩 많이 겹쳐져서 맨 위는 전지 한 장으로 끝나게 하라. 혹은 _폭 10cm 길이 110 cm의 얇은 종이를 가운데 부분만 겹치도록 90도씩 회전하며 흘러내림으로 인해 더 이상 쌓을 수 없을 때까지 쌓는다.

이런 작업에는 정해진 원칙과 정밀한 실행만이 있을 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쌓기 작업에서 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조각의 재료로서 인정하지않는 종이라는 얇고 물렁하고 약한 판재를 엄연한 무게와 부피를 지닌 조각으로 변환시킬 방법을 구상했었다.
그 결과로 쌓아진 종이더미의 형태나 이미지 따위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물론 작품은 그 결의 아름다움이나 무게감같은 자신의 물성을 가지고 어떤 종류의 감성을 전달하면서 감상자를 끌어 들이는 데에 도움을 주긴 하지만, 결과물이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이런 외향적인 매력들은 작품을 완성하는 중요한 양념이라 하더라도 작품의 내용, 또는 작품이 있어야 하는 근원적인 이유일 수는 없다. 내 작업의 주된 내용은 바로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이 세계의 양탄자를 뒤집어 그 밑에 깔린 원리를 찾는 것 _ 그런데 이것은 수학의 정의이고, 나의 작업은 바로 이 정의의 반대 과정, 즉 간단한 원리를 상상하고 그 것을 조각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다. 좀 거창하게 의미를 붙이면 모의 세계의 창조이다. 그리고 나는 감히 이 일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미술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세계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관찰하고 반성하고, 또 새로운 양식은 제안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구체적인 확신을 가지고 작업에 임한 것은 불과 지난 몇 년 간의 일이다.
경첩작업을 처음 시작할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자칭 조각적 본성에 나를 맡긴다는 애매한 태도로 작업을 했었다. 그러다가 점점 접하게 된 수학적 패턴과 물리학의 카오스나 프랙탈, 생물학의 진화 이론들을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과학이라는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하였으나 놀라운 관점들을 접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이미 내 작업의 구석구석에 내재하는 많은 과학적 법칙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 작업이 나에게 많은 노동을 요구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생성과 확장의 과정을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작품들이 모두 작은 단위들의 결합인 것은 한 장의 종이 또는 한 개의 경첩이 하나의 자연수이거나 물질의 기본 단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하나 하나의 단위들은 언제든지 주어진 순열대로 집합하거나 무한를 향해 뻗어나갈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것이 전체가 되기 위해서 (이 과정은 조립이라기 보다는 증식에 가깝다) 기본 단위를 일련의 관계로 연결하는 지시 사항인 `법칙`들이 존재한다.

경첩 작품의 증식 법칙은 경첩 자체의 연결구조에서 오는 제한 조건들을 충족하는 기본적인 법칙에 변형된 구조를 가진 경첩의 개입과 임의성이 더해진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안 되는 법칙에 충실하게 경첩을 끼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프랙탈을 나타내는 자기 유사성의 형태를 발견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무슨 구름의 형태, 복잡한 해안선이나 모여있는 섬같기도 하고 꽃잎 같기도 하다. 자세히 안을 들여다보면 더욱 복잡해진다. 구름 속의 입자나 난류의 흐름 속에 휩쓸린 것같이 정신이 없고 어지럽다. 단순한 기계 부품같이 생긴 경첩들을 연결해서 이런 결과를 접하게 된다는 것은 참 놀랍다. 내가 사용한 단위와 법칙은 대부분 놀랍도록 단순한 것들이다. 그러나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을 개미들이 아주 단순한 행동 규칙 몇 가지만 반복해서 실행함으로써 복잡한 사회를 이룬다는 생물학자들의 쓸모 있는 관찰처럼, 어쩌면 내 작업들은 법칙과 실행된 결과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simply complex 의 한 조각적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집담회 내용을 정리하며
밈Meme을 잡으러 간다

2005

김주현
 
영상 기록을 글로 옮기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던 일을 직접 하면서, 이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는 음성과 입 모양, 표정을 유심히 반복해서 듣고 보면서 집담회 당시에는 간혹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 한 분 한 분의 의도를 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일을 대신해서 쓴 글만 보았더라면 이처럼 마음에 와 닿는 감사와 이해가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작업의 의미는 사유의 방식이고, 놀이이다. 또한 내가 만나는 한계에 대한 도전의 방법이며, 삶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다. 나는 작업을 하면서, 그리고 삶을 살면서도 다른 이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작업을 통해서 나를 탐색하고, 규정하고, 표현하는 일에만 매달려왔다. 거기에는 나와 내 작업만의 관계가 있을 뿐, 제3자가 개입될 여지는 없었다. 정기용 선생님께서 짚어주셨듯이, 나는 작품에다 대고 열심히 일기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비참하고 쓸모없는 자(일반적으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체가 그러하다)의 삶을 계속해서 서술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것이 작은 아름다운 의미라도 갖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최소한 작업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작업에 완전히 만족한다.
문제는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는 데서 생긴다. 나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작은 그릇에 불과한지라 여태껏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남들 하듯이 주어진 형식대로 몇 번 개인전을 하면서, 도대체 이런 소모적인 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의 작품들은 처음부터 타자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데다 유행하는 현대미술의 어떤 사조와 곧바로 이어져 있지도 않고 미술시장과도 무관하니 다른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반응을 얻기가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상품가치도 없고 동시대 미술에 쓸 만한 담론을 제공하지도 않으면서 계속해서 전시회를 여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단순한 자기 과시가 아닌가? 이런 회의가 생길 무렵 내가 읽은 것이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자론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자 이론은 여전히 많은 논의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내 귀에 쏙 들어온 것은 바로 문화적 유전자 개념인 밈(Meme)에 관한 주장이었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신의 생각인 밈을 전파하고 살아남게 하는 일이 생물로서의 유전자(Gene)를 보전하는 일만큼 또는 그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밈(Meme)의 개념은 내가 그때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의 사회 문화행위에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생물 개체로서의 본능 이외에는 어떤 절대 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가능한 자신을 사회, 역사, 지역 심지어는 문명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던 나에게, 인간의 사회문화 활동의 욕구와 필요성에 생물적 본능만큼의 비중을 부여하는 밈의 개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왜 내가 하나밖에 없는 나의 50% 생물학적 유전자 계승인을 제쳐두고 작업에 몰두했는지를 해명할 수 있었다. 남들은 모두 알았을 터인데 나만 모르고 있던 소통 문제의 중요성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나의 작업이 내 안에만 머물러서는 의미가 없으며, 그것을 전시 형식이든 다른 형태로든 남들과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저, 을유문화사 발행

현대미술 작품에 대한 평론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은 단 두 명인데, 하나는 작가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글쓴이라는 말을 듣고 깔깔 웃은 적이 있다. 나에게 그 말을 해주었던 사람은 그 해에 수 개월간 내 작업을 평하기 위해 특별히 과학서적을 여러 권 읽었고, 몇 번의 논의 끝에 원고지 250매에 달하는 감동적인 글을 써주었다. 나는 1년 반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작품을 자신 있게 발표하는 전시 도록에 그 논문을 실어 500부나 배포하였으나, 그 후 어느 누구와도 그 글의 세부적인 내용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결국 그 글이야말로 우리들 둘을 위한 글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평론가의 글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미술과 과학을 연결하려 했던 다소 진지한 우리의 시도를 수용할 기반과 경로가 우리 사회에 부재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 복잡성에 관한 조형적 연구와 더불어 그의 글의 가치가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고 인정받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이 일을 통해서, 아무리 최고의 수준을 자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발표하는 경로와 방법이 적절하지 못 할 경우에는 얼마든지 사장될 수 있음을 실감해야 했다. 그래서 이제까지 내가 오직 나의 밈(Meme)의 개발에만 전념하였다면, 이제는 그것을 확장할 경로를 마련하는 일에 힘을 쏟아야겠다고 느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비단 내 작업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 벌써부터 현대미술의 사장 위기가 논의되고 있었다. 미술뿐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이 분야별로 전문화되면서 일반인과의 결별은 물론이거니와 상호 간의 소통이 두절되어 있다. 이제는 20세기 초의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분야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공통의 화제를 가지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완전히 분리된 채 각자의 깊고 깊은 땅굴을 파고 있는 셈이다. 깊이는 있으나 서로 간의 연결이 단절된 가운데, 하나의 굴 안에서도 다시 여러 길이 나뉘어, 나만 해도 바로 옆에 있는 동료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 내 옆의 많은 동료들도 내 작업을 바로 그렇게 볼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소통이 단절된 수많은 분과학문의 효용성의 문제가 안팎으로 제기된다.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상품 가치가 있거나 기술로 응용되는 것이 아닌 학문들은 효용 가치를 의심받고, 이제 그 존속 여부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여러 학문 분야 간에 연결 고리를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어차피 인간 사유의 내용이야 크게 다르지 않을 바, 다른 것은 그 방법일 뿐이므로 조금 생소하더라도 자신의 전공과 다른 분야의 용어와 방법론을 익혀서 서로 간의 대화가 가능하도록 소통의 폭을 넓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고립되었던 문화와 문화가 만나는 시점에서 새로운 문화가 폭발하는 것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중요한 깊이를 확보했던 서로 다른 학문이 만남으로써, 단지 소통의 폭이 확장될 뿐 아니라 지루하게 고갈되었던 각 분야의 내용에서도 새로운 소재들이 쏟아져 나오리라는 예상을 해본다. 이미 현대과학의 분야에서는 카오스, 프랙탈, 복잡성 그리고 디지털 진화이론이 물리와 수학, 화학, 생물학의 범주를 휩쓸면서 경제, 사회, 정치 등 인문사회학의 영역으로 범람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자리에 미술과 철학 같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사유하는 학문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자본과 기술과 권력의 논리만으로 운영되는 인간사회에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사고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과연 미술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현대미술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외부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감지하고,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것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형식으로서 예술은,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그 사회의 내부에 편입될 수 없다. 자기가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의 돌들을 빼내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흔히 좋은 예술가들이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유형의 예술가가 현실에 수용되었다면, 결국은 기존의 예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거나 절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으로써 추후에는 자기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가끔은 어떤 극단적인 예술가가 결국 자신의 삶조차 파괴해버리고 마는 것을 본다.
순수 예술이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받지만, 이 무능해 보이는 자들의 예술 활동은 그것이 겉보기에 아무런 효용성을 갖지 못하는 탓에 더욱 큰 감동과 사유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예술가들이 사회의 구심점을 이루는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독자적인 시각을 확보할 수 있고, 그래서 사회가 그들로부터 진정 쓸 만한 충고를 들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쩌면 그 둘 사이의 거리를 창의성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생산과 소비의 거래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예술의 정신적 역할을 고려한다면, 어떤 예술 작품이 인기가 없다고 해서 그 생산자에게 생존을 위한 발 빠른 변신을 종용하기 전에, 먼저 예술가가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내용과 표현 형식의 적합성을 진지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라 수용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 특히 안정된 삶을 누리는 집단의 사람들은 예술가들의 이 같은 간섭과 비판을 좋아하지 않는다. 설령 예술가들의 충고가 정말 쓸 만하더라도 변화를 바라지 않는 것은 기존의 세계가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속성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설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법을 간구하는 노력은 예술가만의 몫이 아니고, 예술의 가치를 인지할 능력이 있는 여러 다른 분야와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기울여야 할 노력이다. 나는 우리 사회에 이 몫을 담당할 사람들이 절멸하였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일로 너무들 바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당대의 예술을 해석하고 수용함으로써 예술가가 제공하는 풍성한 사고에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를 수정하는 것은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지극히 자기고백적인 작품조차도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을 때, 그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어떤 한 예술가의 성공이나 좌절은 그가 속한 사회가 어떤 문화를 섭취했느냐에 따르는 결과의 단면이다. 만일 한 사회가 지속적으로 쉽고 편한 것만 편식하는 성향을 지닌다면, 자기를 연결시킬 주변의 생장점들을 잃어 더 이상 위로도, 옆으로도 확장해 나갈 수 없고, 종국에 가서는 생을 마감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 내가 나무막대를 쌓으면서 줄곧 했던 생각이다. 그리고 그 긴 몰락의 시간 동안 되풀이해야 할 개체 차원의 고통을 떠올리면서 다시 한 번 사회에 대해서 사유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기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나의 미술 작업은 과학적 사고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내부를 관통하는 요소와 관계들의 법칙에 대한 나의 관심이 내 작업을 과학의 영역으로 자꾸 유인하고 있다. 과학에 문외한인 내가 현대과학을 소개하는 불과 몇 권의 책을 읽고, 과학의 사고를 공유하고 중요한 철학적 반성의 기회를 누리며, 그 감상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독자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그 의견을 서로 나누고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예술 작품을 제작하고 전파하는 목적이 진정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우리들 한 개체가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현재의 지배적인 어떠한 예술 개념과 형식도 영속적일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새로움 자체를 위한 변화가 아니다. 그러나 한 작가가 사유하는 내용이 이 시대에 유용한 것이라면, 어떤 형식의 유형에도 구속되지 않고 그 내용에 맞는 새로운 형식의 확장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작업의 내용에 맞게 자신의 작업을 발표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도 작가가 해야 할 소임의 하나이다. 나는 그 수단의 하나로써 집담회를 마련했다. 내 작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소수의 선생님들을 초청하여 함께 대화를 나누고, 이 자리에서 나눈 생각이 다시 한 분 한 분을 기점으로 해서 외부로 퍼져나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집담회의 논의가 반드시 내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더라도 이러한 시도가 예술 소통을 위한 노력의 한 예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하는 미술 작업이 몇 사람에 국한되는 좁은 미술계를 뛰어 넘어 소통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면, 나의 작품이 더 이상 미술이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까지도 한다. 그러나 내가 정신적 사유의 과정을 물질화하는 작업을 계속하는 한, 표현의 내용과 형식이 좀 바뀐다고 해서 내 작품이 미술이 아닐 리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 작업의 소통의 폭을 넓히는 것은 곧 미술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머릿속에서, 그리고 저 깊이 가슴속에서 처음 보는 밈(Meme)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나는 저 밈을 잡으러 간다.








집담회 프레젠테이션
2005

김주현
 
우선 저의 초기 작업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지난 20년간 제 작품들은 외형상 많이 변한 듯하지만, 하나의 작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는 늘 이전 작업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작업을 소개하는 것이 지금 전시하는 작품을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1. 이것은 석고를 부어서 만든 작품입니다. 원추형의 틀을 미리 짠 다음에 거꾸로 놓고 석고를 밑에서 부었습니다. 그런 후에 원래 있던 틀을 제거하면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제목을 뒤늦게 지었는데, <원터치 조각>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에 만든다’는 뜻으로, ‘원터치 캔’이라는 말에서 빌려 왔습니다. 조각의 전통적인 방법에는 흙으로 성형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다시 다른 재료로 복제하고, 또 그것을 마무리하면서 다듬어야 하는 긴 과정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과정이 불필요하기도 하고, 이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작업 초기의 의미를 많이 변형시킨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모두 생략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이 작품은 단 한 번만 석고를 개어서 부으면 그대로 완성이 되거든요. 전혀 수정할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지요.


2. 석고 작품의 내부에는 보시는 드로잉과 같이 생긴 철근이 들어 있습니다. 안에 철근이 들어 있어야 틀과 석고의 형태가 유지되거든요. 철근은 석고 안에서는 형태를 유지하는 구조체이고, 또 석고 밖으로는 새어 나오는 녹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럴 듯하게 장식적인 효과를 주지만, 무의미한 장식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그 당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조각가들이 다루는 재료로서의 물성과, 그 물성을 어떻게 하면 감성적으로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즉 조각의 물성과 감상자의 감성 사이의 역할 조정에 관한 것이었어요. 조각가가 어떤 재료를 쓰든 이 양자 사이에서 섬세한 조정자 역할을 잘하지 못하면 좋은 조각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물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다 보면, 그것들이 무엇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스스로 말한다고 믿을 정도로 물성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조각가가 바라는 형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지요.


3. 이 작품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재료를 쓴 것입니다. 밑에 석고가 있고 그 위에는 철판이 있는데, 마치 철판의 무게가 석고를 누르는 것 같이 대비되도록 하되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도록, 두 재료 간의 균형을 맞추는 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4. 이 작품은 내부와 외부의 벽을 각각 겉틀과 동판으로 짜서 사이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시멘트를 채워 넣은 것입니다.
5. 이것은 안에 석고를 채우면서 윗면을 불룩하게 하여 장독대에 눈이 온 것 같은 느낌을 만들었습니다.
6. 이 작품은 아래에 방석 모양의 흰 석고 틀을 만들고, 그 위를 커다란 철판으로 눌러서 실제로 그 누르는 힘에 의해 석고가 불룩하게 올라오도록 하였습니다.


7. 제가 1989년 처음 석고 작업을 시작하였고, 1998년 모란갤러리 전시를 위해서 이 작품을 만들었으니까, 거의 10년 동안 붓기 작업을 계속해온 것이 되네요. 그러다가 석고의 무게와 시간 제약이라는 한계를 느껴서 다른 작업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고, 석고의 덩어리를 나누어서 단위화할 수 있는 구조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한꺼번에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고, 무게를 나눌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물성과 감성이라는 문제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가장 석고와 같은 것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아주 얇은 종이를 책받침에 대고 찢어서 쌓아 올리게 되었습니다.


쌓은 종이 위에 철판을 올리니까 종이의 옆면만 보이는데, 밀도와 부피감도 있으면서 섬세한 느낌이 좋았어요. 주로 얇은 종이를 쌓은 것은 일반적인 인식을 훨씬 넘어서는 재료의 전환을 노렸기 때문입니다. 얇은 종이도 많이 쌓으면 큰 덩어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이때만 해도 물성의 문제가 저에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종이의 찢어진 질감을 살린 옆면을 의식하면서 작업을 했는데, ??8. 이 작업부터는 가공하지 않은 전지를 사용했습니다. 전지를 조금씩 차이가 나게 겹쳐서 쌓았는데, 그 작은 차이들이 계속 쌓여서 옆면에 어떤 윤곽을 만들고, 그 윤곽이 전체 형태를 변형시킵니다. 이 작품에 사용한 종이는 2001년 쌓기 작업을 기록한 도록을 만드는 데 재활용했습니다. 도록은 남았지만 작품은 없어진 거죠.


9. 청사진 종이를 길게 잘라 띠를 만들어 90°로 돌려 쌓으면서 가운데의 정사각형 부분만 겹쳐 쌓았더니, 겹쳐진 부분과 겹쳐지지 않은 부분의 차이가 처음에는 별로 없었는데, 나중에는 그 높이가 네 배 정도 차이가 생겼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운데가 불룩한 곡선 형태가 생겨났지요. 쌓기 작업을 할 때 제가 주목한 것은 약 0.01mm 두께밖에 안 되는 종이 한 장의 차이는 굉장히 미세하지만, 일련의 법칙에 따라 반복 실행하면 그 결과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상에서 느끼는 어떤 현상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흔히 과민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평균보다 예민한 감각들, 일상의 피할 수 없는 사소한 감정들,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차이들, 이런 것들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그것이 쌓이고 쌓이면 큰 산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10. 대안 공간 사루비아에서 전시했던 작품인데 종이만큼 얇은 알루미늄 판을 쌓은 것입니다. 언뜻 보면 하나의 정육면체일 뿐인데, 4개의 옆면에는 수직으로 틈들이 있지요. 일종의 선 드로잉으로 생각하고 구상한 이 틈들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 정육면체의 내부에는 60가지의 서로 다른 육면체가 조합을 이루고 있어요.


11.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단순한데, 그 속에는 이와 같이 복잡한 구조를 숨기고 있는 거지요. 이러한 내부 구조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깥면의 선 드로잉들을 만들기 위해서이고, 정육면체의 네 옆면에 보이는 그린 것 같은 선은 내부를 관통하는 틈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부의 구조와 외부의 현상이 서로에게 필연과 당위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12. 쌓기 작업을 여기까지 진행하면서 동시에 경첩 작업도 같이 해왔습니다. 종이 작업이 어떤 단위를 상하로 높이 쌓으면서 전체 덩어리를 형성하는 일이라면, 경첩 작업은 판재 단위를 수직으로 연결하여 세우면서 면을 채우는 것입니다. 처음 만든 경첩 작품은 높이가 1.46m로 높았습니다. 옆면에 보이는 수직 절단면의 밀도와, 함석판이 반사하는 빛과 색이 어우러져 볼륨감이 드러나게 했는데, 이 작업을 하다 보니 오히려 윗면이 재미있는 거예요.


13. 그래서 윗면을 넓히고 대신 옆면을 생략하면서 높이는 낮추었어요. 높이가 극단적으로 낮아져서 바닥에 얇게 깔리거나, 아예 평면 드로잉으로 대체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윗면에 보이는 구조를 두께로 받쳐 주는 조각의 깊이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최소의 깊이, 즉 옆면의 길이는 지금 보시는 것과 같은 30cm입니다.


14. 이것은 경첩 작업의 윗면 패턴을 연구하기 위한 드로잉입니다. 한 점을 중심으로 16가지로 퍼져나가고, 한 가지에서 두 가지, 거기에서 각각 세 가지, 이런 식으로 다시 두 가지, 세 가지로 증식합니다. 중간에 한 번 합류해서 수를 줄이는 지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서 마지막에는 각각의 경첩 끝이 지름 2m의 원주를 384개로 나눈, 약 1.5cm로 간격을 유지하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마치 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나무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사실 이런 방사형 패턴은 자연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그래픽 디자인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러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드로잉을 할 때나 경첩을 조립할 때 수학적 계산에 의해 아주 정밀하게 설계는 하지만,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실행 방법을 간구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미세한 불규칙성들이 규칙적인 패턴 전체에 확산될 때, 그 결과가 어떤 감성으로 우리에게 보일지를 알아보고 싶었어요.
이것은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써서 그린 건데 원래는 연필 드로잉입니다. 연필만큼 미세한 손 떨림을 잘 전달하는 재료도 드물지요. 저의 작업이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과 사상적으로 동일한 관심의 선상에 있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카오스 이론의 기초가 된 스트레인지 어트렉터(strange attracter)와, 나비효과를 발견한 미국의 기상학자 E. 로렌츠는 동일 프로그램을 반복 시행하는 데서 발생하는 엄청난 결과의 차이가, 사실은 초기 입력 당시 무시했던 소수점 이하 세 자리의 수라는 미세한 차이 때문인 것을 알아냈습니다. 커다란 전체적 명분 아래서 항상 무시되어 왔던 작은 것의 중요성에 새롭게 주목하는 이 태도가 현대과학의 여러 분야에 큰 사상의 변혁를 가지고 온 것이지요. 이것은 곧 제가 작업을 통해서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5. 이것은 수학책을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도판입니다. 그런데 하도 아름다와서 한참 들여다보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경첩 부품으로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이었어요. 이 도판을 응용하여 만든 것이 다음 작품입니다.


16. 349개의 경첩이 연결된 두개의 나선형 집합입니다. 이때 처음으로 저의 작업에 수학적인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반가워서 마치 마음에 꼭 맞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17. 이것은 13번의 크기를 직경 4m로 확장한 작품입니다. 크기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게 되는 것은 경첩과 같은 조립식 작업이 지니는 속성이 아닌가 합니다.


18. 이 작품은 지금 여러분이 보신 전시장에 있는 작품과 쌍을 이루는 작품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자체라고 해야겠지요. 불규칙하게 보이는 전시장의 작품은 원래 전체 형태가 사각형인 그리드의 집합에서 출발합니다. 거기에 길이가 다르거나 혹은 사각형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오각형이나 삼각형으로 바꿀 수 있도록 변형을 약간 집어넣으면


19. 이런 식으로 형태가 완전히 바뀌거든요. 이것 따로 저것 따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드 형태를 먼저 만들고, 그것을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20. 가까이에서 보면 처음에 있었던 그리드의 형태를 얼마간 찾을 수 있어요. 조금 밀고 잡아당기고 해서 형태가 변형되기는 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마름모 형태가 계속 연결되는 처음의 사각형, 격자라는 아주 규칙적인 구조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변형은 전체의 약 10~13%에 불과해요. 이런 정도의 작은 변형을 개입시켜서 전체 형태를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여전히 신기합니다.


21. 조립된 경첩을 그룹지어 넓은 공간을 채우고 비우고 마감하면서 확장시켜 본 것입니다. 2002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광경입니다.


22. 세부 사진입니다. 하나하나의 경첩을 연결하는 과정은 1에서 4까지의 수가 등장하는 간단한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 개의 경첩을 한 점에서 봉으로 연결하려면 연결고리를 수직으로 차례차례 배열해야 합니다. 이미 1, 2, 3의 자리를 다른 경첩이 차지하고 있으면 그 자리에는 4가 올 수 밖에 없고, 그 경첩의 다른 방향에는 4의 짝인 2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 점에는 2를 제외한 숫자가 와야 하는 식입니다. 요즘의 어린아이들이 강요당하듯이 이런 단순한 문제를 끊임없이 풀어야 한다면 수학을 혐오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겠지요. 그런데 저의 수학 문제 풀기는 조각 형태라는 해(解)를 갖거든요. 단순하지만 결코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고, 순간순간 사소하지만 방향과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의 권한도 있어요. 그것을 이용해서 저는 미지의 형태를 희망하면서 하나하나 경첩을 연결해 나갑니다. 결국 경첩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인데, 이런 규칙적인 기하학적 형태들의 합이 얼마든지 유기적이고 자연물을 닮은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23. 이것은 단순복잡성(Simply Complex)이라는 다른 프로젝트입니다. ‘Simply Complex’란 하위계에서는 단순히 결정론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집합인 상위계에서 돌연 나타나는 복잡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저 나름대로 이에 조각에서의 의미를 붙인 뒤 그 예를 들어보았는데, 적합한지는 모르겠습니다. 뒤에 보이는 것이 벽면에 얇게 붙인 종이쌓기 작업입니다. 비교적 평면적이라 할 수 있지요. 쌓은 종이의 부분을 중간 중간을 끊어서 임의로 선택한 축을 중심으로 분리-회전시키면 평면적이던 것이 쉽게 입체가 되지요. 이제 이것을 하나가 아니고 2개나 3개를 여러 지점에서 서로 만나게 해서 무게 중심을 유지하는 완전한 입체물로 만든 것이 파이프 작품입니다.


24. 파이프 작품은 평면으로 보이는 종이 작품 3개가 같이 만나는 구조이어서 작품의 제목을 <Multi-Body-Problem>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원래는 ‘Many-Body-Problem’이라는 수학적인 문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수학자가 계시지 않아서 다행입니다만 그래서 제가 정식 명칭이 아닌 ‘Multi’로 바꿨어요. 혹시 ‘Many’라고 했다가 혼날까 봐요. 사실 <Many -Body -Problem>에는 동역학의 운동 개념이 포함되어야 하지만, 저는 단지 회전으로 운동의 가능성을 줄여서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단순한 평면이라는 초기 값을 단지 회전이라는 요소만으로 입체화하는 과정에서, 평면에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복잡한 형태가 나타나는 현상을 탐구한 것입니다. 이 작품의 모형을 만드는 일은 쉬웠지만, 실제 크기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무려 45장의 도면이 필요했습니다. 그나마 도면이 너무 복잡해서 도면을 보고 입체를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 저 말고 또 누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25. 복잡성 연구(Study of Complexity)라는 이 프로젝트도 평면에서 입체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연구인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개도와 다면체에 증식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어요. 최종 목표 5단계는 실세계의 복잡도를 가상화한 것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의 복잡성(5단계)은 어쩌면 제가 제시한 것 같이 단순한 초기 모듈(1단계)의 3제곱이라는 식의 단순한 법칙이 반복, 적용되어 생길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조각으로 입증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물론 이 단순한 법칙을 실행하는 데도 역시 자율적인 세부 선택과 소수의 변형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1단계 모형과 도면인데, 여러 개의 정육면체를 결합시켜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간단한 형태를 입체로 만들었습니다.


26. 2단계에서는 3개의 1단계 모형을 결합시키면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도록 조립합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주관적 선택이 개입되지요. 서로 겹쳐지는 불필요한 면이 제거되는 반면, 구조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면들이 추가됩니다. 그런 다음 이전 단계의 세 모형을 전개도로 풀어 각각 다른 색으로 모든 면의 번호를 표시한 후, 겹치거나 끊어지는 부분이 없이 하나의 평면 위에 연결되도록 전개도를 그렸습니다.


27.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해서 2단계를 3개 만들어 서로 결합시켜서 3단계가 되고 28. 다시 또 4단계로…


29. 이것은 5단계 도면입니다. 이 정도 되니 전개도에서도 세계지도와 같은 형태가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은 5단계 모형입니다.
제가 조각가이니까 여기까지만 하면 너무 쉽고 재미가 없지요. 모형들은 속이 비어 있어 복잡한 통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내부 공간에 시멘트를 부어넣을 생각이었지요.



34. 5단계 시멘트 붓기 작업입니다. 제가 석고 붓기 작업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이것을 통째로 부어 한 번에 성형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35. 이것은 2004년 갤러리 피쉬에서 열린 개인전 모습입니다.




36. 37. 이것이 여러분이 보시는 이번 전시 작품입니다. 나무쌓기 작업에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법칙이 없어요. 도면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저 전체 무게 중심을 맞추어 무너지지 않도록 하면서,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에도 다양한 선을 그리도록 각목을 가능한 한 높이 쌓아올리는 작업입니다. 각목은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길이를 이용하면 평면에서의 기하학적인 선을 대체하는 좋은 조각의 재료가 됩니다. 평면에 겹쳐 그리는 기하학적 문제와 달리, 쌓기 작업에서는 같은 층을 맞추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층의 높이를 맞추면서, 특정한 점을 불필요하게 여러 번 반복하여 오고가지 않고, 전체 구조가 너무 안정적이어서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쓰러지거나 부러지지 않을 만큼 무게 중심도 잡아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새롭게 연결할 점을 계속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들을 모두 충족시키면서 될 수 있는 한 높이 쌓는 것입니다. 한 곳에서 시작해서 멀리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부메랑 형태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도전적인 형태였어요. 사실 적당한 장소에 마음대로 나무를 높이 쌓는 것이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는데, 그게 생각만큼 되지 않더라고요. 같은 레벨을 맞추면서 무게와 형태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어딘가에 새로운 막대를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신나게 어떤 한 부분을 편중해서 쌓다 보면 주변의 층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기 때문에 균형이 깨져서 더 이상 높이 쌓을 수 없었어요. 그것은 마치 고립된 생물의 생장점이 고사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38. 나무쌓기의 부조 작품입니다. 벽면에 닿는 아랫부분에서는 아주 좁게 시작하여 위로 올라감에 따라 점점 넓혀나가면 처음에는 7개의 서로 독립된 개체로 시작했던 것이 10층 정도부터 만나기 시작하여 점점 연결점을 공유하면서 쌓여가다, 결국 서로 꽉 물려 하나가 됩니다. 외관상 서로 완전히 무관해 보이는 것들이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어떤 고차원에서는 서로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래층의 어떤 부분만 보고 있다면 서로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촘촘한 연결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39. 이것은 마치 계단처럼 높이 쌓다가, 반대로 내려 쌓기를 반복하여 원형을 그리면서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40. 가능한 벽에 얇게 붙이면서 넓은 공간을 점유해나가는 일종의 입체 드로잉입니다. 경첩 연결과 쌓기에서 서로 다르게 시작한 작품의 전체 형태와 패턴이 입체와 평면의 중간 지점에서 합류하고 있습니다. 경첩 작업의 패턴이 완전히 단면 위에서만 표현되었다면 여기에서는 깊이, 즉 층이라는 요소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지요.
여기까지 저의 작업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